Writer's Room

규진씨의 전대미문의 글쓰기 대모험

by 김태춘

규진 씨는 거실 탁자 위에 있던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텔레비전 속에는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남자가 정글의 진창에 빠진 트럭을 빼내기 위해 그의 조수들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들은 비와 땀과 붉은 진흙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그는 텔레비전을 끄고 리모컨을 소파 위에 가볍게 던졌다.
그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의 방에는 크고 작은 책들이 빼곡하게 꽂혀있는 짙은 호두나무 책장이 벽을 따라 짜여있었고 창문 앞에는 책상이 있었다. 책상 위에는 커다란 모니터와 키보드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바퀴가 달린 의자를 당기고 책상 앞에 앉았다. 컴퓨터의 전원을 켜고 키보드 위에 손을 얹었다. 모니터가 밝아지며 고양이를 안고 있는 어느 미국 소설가의 흑백사진이 화면에 깔렸다. 그리고 그는 워드 프로세서에서 새로운 문서를 만들었다. 그는 깜빡이는 커서를 잠시 바라보고 있었다.
‘음. 아니야. 뭔가 께름칙해.’ 그는 오른쪽 손목을 돌렸다.
‘편치가 않아. 글을 꾸준히 쓰려면 손목이 중요한데 이걸로는 안될 것같애.’
그는 곧바로 인터넷 창을 열고 주요 검색포털 사이트를 번갈아 가며 키보드와 손목의 상관성에 관한 자잘한 지식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인 상당한 양의 정보를 치밀하게 분석했고 그 결과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일반적인 형태의 키보드는 필연적으로 손목 통증을 유발하며 이는 손목 터널 증후군뿐만 아니라 경추추간판탈출증, 요추간판탈출증, 편두통, 우울증, 공황장애, 불면증, 성기능 저하, 탈모, 무좀, 통풍과 치질에 이르는 심각한 질병들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어느 파워블로거가 친절하게 정리해 놓은 ‘최고의 키보드 10종’이란 글을 꼼꼼히 읽었다. 그중에서 3종류의 키보드를 추려내 가성비, 성능, 사용 후기와 A/S 가능 여부 등을 꼼꼼하게 따져 결국 하나를 선택했다.
‘인체공학 손목 편안한 키보드’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가격과 배송료의 유무, 교환가능 기간 등 세부 사항까지 면밀히 따져보고서야 마침내 주문을 완료했다. 누군가는 웃을지도 모르지만 비록 몇백 원의 손해조차 그는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쉽게 읽는 자본론’ 부터 ‘1% 부자의 대화법’까지 섭렵한, 자본주의의 가치를 따르는, 이성과 합리를 중시하는, 말하자면 ‘현대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렇지.’
전자제품을 구입할 때는 추가로 3%가 더 적립되는 카드로 결제하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그는 벌써 꿈에 한 걸음 더 다가간 듯했다. 뻐근한 목을 돌리며 휴대전화를 열었다.
‘벌써 새벽 3시잖아. 좋은 글은 이른 아침 맑은 정신에서 시작되는 건데. 내일을 위해서 오늘은 그만해야겠어.’
그는 전화기를 닫고 일어나 침실의 문을 조용히 열었다. 아내는 침대 왼쪽에서 이불을 반쯤 덮고 잠이 들어 있었다. 안경을 벗고 아내 옆에 조용히 누웠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문득 그가 좋아하는 작가의 새로 나온 책이 궁금해졌다. 머리맡에 놓아둔 휴대전화를 다시 집어 들고 유튜브의 검색창을 열었다.
‘김문성 신작 인터뷰’
이름이 잘 알려진 평론가와 했던 최근 인터뷰 영상이 가장 위에 올라왔다. 그는 무심코 영상의 섬네일을 눌렀다. 그러자 갑자기 비타민 음료 광고가 귀를 때리며 쏟아졌고 곤히 자던 그의 아내가 얼굴을 찡그리며 신음을 냈다.
“음…”
그는 휴대전화를 얼른 닫아버리고 볼륨 버튼을 아래로 꾹 눌렀다. 그리고 다시 휴대전화를 열어 광고가 끝이 나고서야 볼륨을 한 칸으로 올리고 오른쪽 귀 바로 옆에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작가에 대한 간단한 소개가 끝나고 평론가가 작가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작가의 무덤덤한 대답이 이어졌다. 그는 곧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아내는 나가고 없었다. 휴대전화에서는 밤새 추천 영상들이 연속으로 재생되었고 이제는 ‘인류가 아직도 풀지 못하는 101가지 미스테리’가 나오고 있었다. 영상을 끄고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벌써 열한 시 반이 넘어가고 있었다. 밤새 영상에서 나오는 온갖 말소리에 시달려서 그런지 머리가 무겁고 온몸이 뻐근했다. 그는 베란다에 가서 전자담배 버튼을 누르고 창문을 열었다.
‘아. 아니야. 이런 몸 상태로는 좋은 글을 쓸 수가 없어. 명상과 요가로 마음과 몸을 최적의 상태로 만들자. 창의력을 최대로 끌어낼 준비가 필요해.’
그는 휴대전화기의 유투브 창을 열어서 ‘명상’을 검색했다. ‘하루 10분 만병을 치료해 주는 명상음악’부터 ‘마음을 비워주는 10분 명상 가이드’까지, 왜 하필 ’10분’이어야 하는지 이해가 잘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화면을 계속해서 훑어 내렸다. 그러다가 ‘10분 비움 명상’이라는 큼지막한 타이틀에서 시선을 멈췄다.
‘그래, 폰트도 큼지막하고 무심하게 기른 수염하며 다부져 보이는 저 입술. 믿음직스럽네.’
그는 베란다 창문을 닫고 거실로 들어와 속옷만 입은 채로 거실 바닥에 앉아 양반다리를 했다. 영상은 일정한 간격으로 낮게 울리는 종소리로 시작되었다. 그는 종소리를 들으며 그 영상의 지시에 따라 호흡과 몸에 집중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1분도 채 되지 않아 복숭아뼈가 살살 아프기 시작했다.
‘음. 아…..이런 게 마음공부의 시작이겠지.’
복숭아뼈에서 시작된 고통은 시간이 지날수록 발목과 다리 전체로 퍼졌고 결국 그는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의 고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영상 속의 도인은 여전히 편안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이어 나갔다. 그는 얼른 영상을 끄고 한 손으로 저린 다리를 주무르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10분 요가’를 검색했다.
‘오히려 몸이 더 굳어진 것 같다. 일단 몸부터 좀 풀어주자’
영상들이 그의 휴대전화의 화면에 길게 정렬되었다. 그는 화면을 무심코 넘겨보다가 별안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침에 기분 좋은 모닝요가’
편안한 제목과는 달리 섬네일에는 몸에 밀착된 분홍색 타이즈를 입은 여성이 햇살이 은은하게 비치는 화사한 거실 바닥 위에 두 팔을 곧게 뻗고 허리를 구부려 엉덩이를 요염하게 치켜세우고 있었다. 그는 주저 없이 그 섬네일을 누르고 여인의 몸놀림을 한동안 지켜보더니 그 영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오른쪽에 있는 추천 영상을 누르고 또 누르며 수많은 여인들의 아름다운 몸 구석구석을 염탐했다. 그것도 벌써 지루해졌는지 이제는 더 짧고 자극적인 쇼츠 영상들만 골라 빠르게 넘겨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영상이 멈추더니 벨 소리와 함께 지역신문사에서 일하는 학교 후배 이름이 전화기 화면에 떴다.
“선배, 잘 계시지요? 다른 선배한테 들으니까 요즘 글 쓰신다고? 헤헤. 해서…“
요즘 어떤 글을 쓰는지 궁금해서 연락했다고 말했다.
“아….. 그냥 이것저것 다 쓰고 있지. 글에 제한 같은 것은 두지 않으려 해.“
“그래요? 그러면 잘됐네요. 이번에 문학의 달을 맞아서 시민들의 글을 지면에 싣는 기획을 하고 있거든요. 가벼운 글 하나 부탁해도 될까요?”
그는 덜컥 겁부터 났다. 그래서 말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고민할 시간을 벌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못 가 얘기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럼, 써볼게.”
그는 무심한 척 대답하고 나서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머리가 어지럽고 몸에 힘이 급격하게 빠져나갔다.
‘아. 밥을 안 먹어서 그런가….. 그래. 두뇌가 일을 하려면 영양분이 공급되어야 한다지.’
냉장고를 열어보니 아내가 만들어 놓은 밑반찬이 몇 개 있었다. 하지만 시체보관소의 시체같이 딱딱해진 반찬 몇 개와 맨밥으로 한 끼를 때우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지금 필요한 건 생동감 넘치는 한 끼였다. 곧바로 냉동실과 냉장실을 뒤지며 사용할 수 있는 음식 재료들을 파악했다.
‘그래, 점심엔 든든한 비빔밥이지. 비빔밥에는 아무래도 단백질이 부족하니까 돼지고기 수육으로 영양의 균형을 맞추자.’
일단 냉동실에서 돼지고기 앞다리를 한 덩이 꺼내서 전자레인지에 해동시킨 뒤 물과 함께 잠깐 팔팔 끓였다가 찬물에 헹궈 잡내를 제거했다. 깨끗한 물에 고기와 소금, 후추, 마늘, 셀러리를 넣은 냄비를 약불에 올려놓고 타이머의 눈금을 한 시간에 맞추었다. 비빔밥에는 질은 밥보다 살짝 꼬들꼬들한 밥이 낫겠다고 판단한 그는 쌀을 깨끗이 씻고 물의 양을 평소보다 약간 줄여서 밥을 안쳤다. 밥을 짓는 동안 널찍한 냄비에 물과 소금을 넣고 팔팔 끓여 콩나물과 시금치를 식감이 잘 살도록 각각 데치고 찬물에 헹군 뒤 참기름, 다진 마늘을 버무리고 조선간장으로 조금씩 간을 맞췄다. 마침, 아내가 만들어놓은 도라지무침이 있어서 도라지나물은 따로 하지 않았다.
‘아, 이걸로는 뭔가 부족한데….’
그는 뭔가 떠올랐는지 냉장고 채소 칸에 있는 무를 꺼내 채를 썰기 시작했다. 굵은소금으로 무채를 절이고 10분 뒤 새우젓, 고춧가루, 다진 생강, 다진 마늘, 다진 쪽파, 매실 액기스를 넣었다. 손으로 버무리다가 한 줌 집어 맛을 보았다. 새콤함이 부족해서 조금 아쉬웠지만 도라지무침의 쓰고 신맛이 전체적인 균형을 잡아줄 것이라 기대하고 참깨를 뿌려 무채를 완성했다. 그리고 다 익은 고기를 꺼내 도마 위에 올려놓고 한숨 식히는 동안 돼지고기 육수를 깨끗한 면포에 걸렀다. 기름기와 고기 찌꺼기가 모두 제거된 육수를 다시 냄비에 넣고 데웠다. 그리고 다른 쪽 가스레인지에 프라이팬을 올리고 기름을 약간 둘렀다. 팬이 달궈지는 동안 육수의 맛을 보며 새우젓으로 간을 했다. 팬에 계란을 깨뜨리자 경쾌한 소리를 내며 익어갔다. 이제 가스레인지를 양쪽 다 약불로 줄여놓고 널찍한 놋그릇에 밥을 푸고 그 위에 무채와 나물, 도라지무침을 보기 좋게 얹고 돼지고기를 얇게 썰어서 접시에 담았다. 고추장과 계란후라이를 비빔밥 한가운데 넣고 참기름을 둘렀다. 돼지고기가 담긴 접시 한쪽엔 마늘과 햇양파를 먹기 좋게 썰어놓고 종지에 쌈장과 새우젓을 각각 담아 식탁에 놓았다. 그 옆에는 부추를 썰어 넣은 고기 육수를 국그릇에 담고 가스레인지를 껐다.
‘이제 됐다.’
휴대전화기를 꺼내 사진을 몇 장 찍고 호텔 준공식에서 오색 테이프를 가위로 자르듯이 숟가락으로 반쯤 익은 계란의 노른자를 반으로 갈라 밥과 함께 골고루 비볐다. 그리고 크게 한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었다.
‘음. 됐네.’
뜨끈한 고기 육수를 한 모금 삼켜 입을 헹궈내고 새우젓을 작게 한 젓가락 집어 수육에 올린 뒤 쌈장에 찍은 마늘과 함께 입에 넣었다. 지방이 적은 부위였지만 고기의 육질은 매우 부드러웠고, 씹을 때 터져 나오는 육향에 마늘, 새우젓, 쌈장의 풍미가 어찌나 잘 어우러지는지 마치 그것들이 그의 입속에서 손을 맞잡고 강강술래를 도는 듯했다. 밥을 한 톨까지 깨끗이 긁어 먹고 나서 고개를 들어 보니 싱크대고 바닥이고 부엌은 온통 그릇과 음식들로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그래 주변이 정갈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거야.’
그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설거지하기 시작했다. 설거지는 빠르고 효율적으로 진행이 되었다. 싱크대의 음식 찌꺼기까지 말끔하게 처리하고 식기 건조대에 있는 식기들을 마른 수건으로 닦아 습기를 모두 제거한 뒤 찬장에 보기 좋게 넣었다. 그는 깨끗해진 부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드디어 그는 기세 좋게 방문을 열어젖혔다. 비록 ‘인체공학 손목이 편안한 키보드’가 아직 배송되지 않았지만 원고 의뢰가 들어온 이상,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었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 건강 따위는 진작에 포기할 각오를 해야 했다.
그는 무작정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얹고 일정하게 모니터에 깜빡이는 커서를 보며 뭔가 떠올려보려 애를 썼다. 하지만 뭔가 떠오르기는커녕 깜빡이던 커서가 점점 커지며 하얀 배경화면과 함께 일그러지는 게 아닌가. 검정색과 하얀색이 뒤섞인 화면은 서서히 원을 그리며 회전하기 시작했고 그의 눈동자 역시 그 화면을 따라가며 돌고 있었다. 그는 화면을 정지시켜 보려고도 했지만 키보드 위에 올려놓은 손가락은 마비된 것처럼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회전은 갈수록 격렬해져 그의 고개와 함께 상반신까지 휘청거리며 따라 돌았다. 이윽고 이마가 책상에 부딪치고 나서야 그는 겨우 최면에서 깨어났다. 그는 안경을 벗고 한 손으로 이마를 매만졌다.
‘그래, 내가 너무 건방졌어. 모든 일에는 따라야할 규칙과 체계가 있는 법인데. 글쓰기도 마찬가지겠지. 물론 자신감도 좋지만, 좋은 글을 쓰려면 겸손해야 해. 위대한 작가들은 항상 배우려는 마음가짐이 있었어. 배워야 해. 그러라고 책이 있는 거잖아.’
그는 안경을 쓰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집을 나와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는 빠르게 1층까지 내려갔다. 오랜만에 아파트 내의 산책로를 걸으며 나무의 푸른 잎들을 보니 그는 정신이 조금 맑아지는 듯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의 산책은 아파트 단지 서쪽 출입구의 투명한 담장 앞에서 금방 끝이 나고 말았다.
아파트 출입구의 유리 담장은 소리 없이 열렸고 그는 오른쪽으로 보이는 구립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는 정확히 마흔 여 걸음 만에 도서관 입구에 도착해서 중앙에 있는 안내판으로 걸어갔다. 문학 자료실은 2층에 있었다.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문학 자료실로 갔다. 문을 열고 자료실로 들어서자, 에어컨의 상쾌한 바람이 얼굴에 불어왔다. 그는 입구 왼쪽에 진열된 신착도서 한 권을 빼 들고 빳빳한 표지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리고 책 한 가운데를 펼쳐 특유의 종이 냄새를 맡으며 사람들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복사기 옆 의자에 앉아 입을 벌리고 졸고 있는 노인 하며, 연속 간행물 코너의 널따란 책상에 팔을 괴고 잡담을 나누는 아주머니와 아저씨 하며, 창가 앞 좁은 책상에 자리를 잡고 노트북의 영상을 보며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는 학생까지, 모두 그처럼 문학과 책을 아끼는 사람들이었다. 그는 이 분위기 그리고 이 냄새, 이곳의 모든 것을 너무너무너무 사랑하게 되었다. 이렇게 좋은 곳을 왜 인제야 왔는지 스스로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들뜬 마음으로 자료실 이곳저곳을 돌아보던 그는 유명 출판사의 문학전집으로 들어찬 책장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책 표지에 새겨진 대문호의 이름들과 그들의 위대한 작품 제목을 하나씩 낮게 소리 내 읽으며 속으로 탄성을 터뜨렸다. 그는 책장 한가운데 있던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꺼냈다. 그런데 그의 기대와는 달리 그 책은 전체적으로 누렇게 변해있었고 냄새도 썩 좋지 않았다. 구겨지거나 접혀있는 부분도 많았는데 어떤 페이지에는 뭘 먹으면서 읽었는지 빨갛게 국물이 튄 자국이 있거나 사람의 털이 끼어있기도 했다. 그는 얼른 책을 제자리에 꽂아 넣고 손을 털면서 입구 쪽으로 향했다. 입구 맞은편 책상에는 직원들이 투명한 칸막이 뒤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각자의 휴대전화를 보며 업무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입술 아래에 점이 튀어나온 한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어느 책장 앞으로 데려다 주었다. 순간 그는 눈을 크게 떴다. 그 책장에는 전체가 ‘글쓰기’를 주제로 한 책들로 가득했고 들으면 누구나 알만한 유명 국내 소설가의 책부터 생소한 작가의 책까지, 글쓰기에 대한 이론서부터 가벼운 에세이까지 다양했다. 꽂혀있는 책들을 보고 있노라니 아까 후배의 전화에 왜 그리 겁을 먹었는지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에 웃음이 살짝 배어 나왔다.
‘그래. 이거면 되겠다. 늘 답은 가까이에 있지.’
그는 먼저 ‘글쓰기의 모든 것’을 집어 들었다. 다음은 ‘글쓰기 정석’, ‘글쓰기의 전략과 실제’를 차례로 그 위에 얹었다.
그는 책을 빌려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내의 구두가 보였다. 아내는 신발을 벗고 있는 그에게 다가와 그가 손에 가득 들고 있는 책들을 쳐다봤다. 그러고는 세탁실에 전구를 갈았는지 그에게 물었다.
“아. 아직.”
그는 빌려온 몇 권의 책을 작은 방의 책상 위에 올려놓고 서랍을 열었다.
“전구 여기 있어.” 그의 아내가 말했다.
그는 그녀가 식탁 위에 올려둔 전구를 가지고 세탁실 문을 열었다. 접이식 의자를 펼치고 의자 위에 올라서서 전구를 돌렸다. 빼낸 전구 유리 속에는 꼬불꼬불한 필라멘트가 끊어져 덜렁거렸다. 새 전구를 종이상자에서 꺼내 전등에 끼워 넣자마자 불이 갑자기 켜졌고 순간 다른 손에 쥐고 있던 전구를 바닥에 놓쳐버렸다.
그가 깨진 전구를 쓸어 담고 세탁실을 나왔을 때 아내는 빨래를 바구니에 담고 있었다. 그는 거실로 가서 텔레비전을 켰다.
사막 한 가운데를 달리던 트럭이 멈춰 섰다. 운전석에서 피부가 검은 남자가 내리더니 뜨거운 햇빛에 이글거리는 본네트를 열었다. 남자는 연료 공급장치가 고장 났다고 말했다. 그리고 입으로 연료 호스를 빨았다가 누렇고 탁한 연료를 땅에 뱉어내고는 다시 호스를 엔진에 끼웠다. 그러고는 트럭 밑으로 기어들어가 망가진 부품을 떼어내고 트럭 앞좌석에서 양말을 가져와서 부품이 있던 자리에 끼워 넣었다. 노란 축구 유니폼을 입은 그 남자는 카메라를 보고 씩 웃더니 허연 목화를 가득 실은 트럭의 운전석으로 갔다. 그는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침 그가 좋아하는 만화가가 나오는 채널을 발견하고 리모컨을 탁자에 내려놓고 소파에 앉았다.
카메라는 만화가의 방을 멀찍이서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가 덥수룩한 만화가는 문 밖에 있던 스티로폼 상자를 가져와 밀키트를 꺼냈다. 냄비에 물을 올리고 비닐에 개별 포장된 재료들을 입으로 까서 냄비에 넣었다. 냄비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자 만화가는 밥상을 펼쳤다. 멀리서 훔쳐보던 카메라는 이번엔 코앞까지 다가가 냄비에 담긴 곱창전골을 바라보았다. 만화가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익살스러운 표정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만화가는 냄비를 밥상위에 올려두고 찬장에서 소주를 꺼내 뚜껑을 땄다.
그의 아내가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그의 옆에 앉았다. 규진 씨는 만화가가 전골을 먹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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