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r's Room

떠내려가는 섬

by 김태춘

푸르스름한 빛이 부엌의 작은 창문으로 들어왔다. 득진 씨는 소파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새벽에 도착한 문자메시지의 영상 링크를 열고 다리가 짤막한 탁자 위에 휴대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손톱만한 스피커에서 나오는 신경질적인 말소리가 거실을 울렸다. 그는 텔레비전의 까만 화면을 응시하며 이따금 거친 말을 내뱉었다. 거실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이 깬 그의 아내가 안방 문을 열고 나왔다. 아내는 그의 모습을 한번 쳐다보고는 뒤돌아서 부엌으로 갔다. 그의 딸이 거실로 나와 언성을 높여 그에게 몇 마디를 던졌다. 그는 휴대전화의 버튼을 꾹 눌러 영상의 소리를 끝까지 올렸다. 딸은 그를 노려보다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샤워기의 물소리가 멈추고 딸이 화장실에서 나오자 득진 씨가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는 옷을 벗고 거울에 뿌옇게 서린 김을 손으로 닦았다. 세면대 위에 있던 비누로 거품을 만들어 턱과 입 주위에 바르고, 선반에서 일회용 면도기를 꺼냈다. 그는 면도기로 얼굴 위의 드센 털을 한 부분씩 잘라나갔다. 이따금 날카로운 칼날은 그의 피부를 베었다. 피가 얼굴 여기저기에 번졌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게 면도기를 세면대에 쳐가며 피와 잘린 털과 그의 각질이 뒤섞인 거품을 털어내고 면도를 이어 나갔다.
득진 씨는 얼굴을 수건으로 닦으며 화장실에서 나왔다. 딸은 식탁에서 아침을 먹고 있었다. 그는 안방으로 들어가 얼굴에 스킨로션을 바르고, 희고 깨끗한 속옷을 입었다. 옷장을 열어 남색 등산바지를 입고, 딸이 사 준 베이지색 바람막이를 옷걸이에서 꺼냈다. 득진 씨가 거실에 나왔을 때 딸은 보이지 않았다.
“아침은 됐어.”
아내가 묻기도 전에 그가 미리 말했다. 그는 식탁 위에 있는 물과 도시락을 작은 등산 가방에 넣었다.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한쪽에 걸려있던 모자를 썼다.
“좀 늦을 거여.”
그가 아내에게 말했다. 뒤돌아서 나가려는 그를 아내가 붙잡고, 벌어져 있던 가방 앞주머니의 지퍼를 닫았다. 그는 현관문을 열었다.
득진 씨는 가파른 계단을 올라 광장으로 나왔다. 광장에는 기차역을 드나드는 여행객들로 번잡했다. 광장 앞에 있는 도로 한쪽에 관광버스 한 대가 서 있었고, 그 앞에는 사람들이 서너 명씩 모여 있었다. 득진 씨는 그중에 아는 얼굴을 발견하고, 광장을 가로질러 버스를 향해 걸어갔다. 김 씨는 일행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왔어? 여기는 정 씨하고….”
김 씨가 그에게 일행을 소개했다.
“언제 왔어? 박득진입니다.”
득진 씨도 김 씨와 낯선 이들에게 인사를 했다. 예정 시간보다 조금 일찍 버스의 문이 열렸고 사람들은 차례로 버스에 올랐다. 머리를 짧게 자른 버스 기사는 사람들이 올라올 때마다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버스에 오른 사람들은 간식과 음료수를 마셔가며 떠들기 시작했다. 버스는 시내를 돌면서 사람들을 태웠다. 마지막 사람들까지 모두 버스에 오르자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가 일어났다. 그는 마이크를 잡고, 공지 사항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러고는 사람들에게 구호를 같이 외칠 것을 부탁했다. 다 같이 짧은 구호를 외치고 나서 남자는 자리에 앉았다. 사람들은 웃으며 손뼉을 쳤다. 득진 씨는 그제야 바닥에 놓았던 가방을 옆자리에 올려놓았다.
버스는 도심을 빠져나와 오래된 공업단지 서쪽의 외곽도로로 들어갔다. 도로를 따라 늘어선 작은 공장들은 대부분 문이 닫혀있었다. 화물트럭이 있어야 할 공장 주차장에는 깨진 시멘트 바닥 사이로 풀들이 높게 자라 있었고, 건물 한편에는 기계들과 컨테이너가 쌓여 있었다. 그나마 불빛이 켜진 공장들도 외벽이나 지붕에 녹이 슬어 있었다. 어떤 곳은 철제간판이 지붕 끝에 간신히 매달려 있기도 했다.
외곽도로의 끝에는 넓은 강이 있었다. 버스가 나선형 진입로를 돌아 다리 위로 올라갔다. 득진 씨는 멀어지는 도시를 바라보았다. 도시는 오래전에 만들어진 도로 사이로 크고 작은 건물들이 어지럽게 뒤엉켜있었다. 그 아래로 커다란 강이 도시를 에워싸며 흘렀다. 창문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득진 씨는 곧 강이 바다와 만나게 될 것을 알았다. 그의 도시는 물 위를 떠다니는 망가진 기계 부품처럼 보였다.
다리를 건너자 버스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고속도로 옆으로 황량한 논과 밭이 펼쳐졌다. 논 위에 멈춰있던 트랙터가 창문 뒤로 빠르게 지나갔다. 멀리에 높은 산이 있었다. 산은 멈춰있는 듯했다. 짙은 구름에 가려 꼭대기는 보이지 않았다. 산을 에워싼 나무들은 구름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검게 보였다. 산 중턱마다 사선으로 박혀있는 철탑들이 나무 위로 늘어진 전선을 붙잡고 있었다.
버스는 터널 속으로 들어갔다. 풍경들은 모두 사라지고 까만 창문에 득진 씨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모자를 벗어 힘없이 눌리고 허옇게 센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넘기고는 뿌연 눈동자로 얼굴 구석구석 새겨진 주름을 더듬었다. 수염이 나 있던 자리 여기저기에는 아직도 피가 조그맣게 엉겨 붙어있었다.
사람들은 좌석에 고개를 기대고 잠이 들고 있었다. 득진 씨는 별로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이어폰을 휴대전화기에 꽂고, 딸에게 부탁해 담아 놓았던 노래를 틀었다. 노래는 4분의 4박자의 바이올린 전주로 시작되었다. 그 뒤에 이어지는 남자 가수의 목소리는 명랑한 반주와는 달리 구슬프게 들렸다. 후렴으로 이어지면서 가수의 목소리는 더욱 극적으로 떨렸다. 그는 두려움과 불안이 뒤섞인 묘한 표정을 지으며 숨을 가쁘게 내쉬기 시작했다. 노래를 끄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득진 씨가 눈을 떴을 때 버스는 휴게소를 천천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버스는 다시 소란스러웠다. 사람들은 휴게소에서 사 온 음식들을 먹으며 냄새를 풍겼다. 득진 씨는 고개를 들고 버스 맨 앞에 있는 시계를 보았다. 누군가 그가 앉은 자리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까 마이크를 잡고 말하던 남자였다. 그 남자는 좌석의 머리 받침을 붙잡고 몸을 가누더니 금박이 박힌 명함을 건네며 능글맞게 웃었다. 득진 씨는 귀에 꽂혀있던 이어폰을 빼고 명함을 받았다. 남자는 곧장 다른 자리로 가서 명함을 건네었다. 득진 씨는 한자가 섞인 명함을 한 글자씩 읽은 뒤에 검정 가죽 지갑 속에 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 씨가 득진 씨의 옆자리로 왔다. 김 씨는 점퍼 안주머니에서 소주를 꺼내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얼마 만인 겨?”
김 씨는 플라스틱 뚜껑을 열고 한 모금 삼켰다.
“간만이네.”
김씨는 소주를 득진 씨에게 건넸다.
“그러게.”
득진 씨도 한 모금 삼키고 대답했다. 소주는 낡은 식도를 따라 천천히 내려갔다. 득진 씨는 가방을 열고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꺼냈다. 넓적한 플라스틱 통에는 계란후라이가 얹어진 꺼먼 잡곡밥이 있었고 좀 더 작은 통에는 제육볶음과 김치가 있었다.
“인제 좀만 더 가면 되는가 봐.”
김 씨가 말했다. 그들은 밥에는 손도 대지 않고 제육볶음과 김치만 안주 삼아 한 젓가락씩 집어 먹으며 번갈아 소주를 삼켰다. 득진 씨는 얼마 전에 있었던 지인의 장례식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그들은 고인이 겪은 일련의 병치레와 수술과 죽음에 대해 담담하게 얘기를 나눴다. 서로의 건강을 묻기도 하고 자신들이 알고 있는 식이요법과 영양제, 운동법에 대한 자잘한 정보들도 공유했다. 그들의 대화는 뜬금없이 결혼식을 앞 둔 김 씨의 아들 얘기로 이어졌다. 김 씨는 며느리의 직업과 새로 얻은 신혼집과 사돈들에 대한 얘기를 쉴 새 없이 득진 씨에게 늘어놓았다.
“딸은? 결혼 계획 없는겨?”
김 씨가 물었다.
“몰러, 걔는 지가 알아서 잘 할꺼여. 뭐.”
득진 씨는 관심 없다는 듯이 김 씨에게 대답하긴 했지만 곧바로 자신이 입고 있는 바람막이를 가리키며 슬며시 딸의 얘기를 꺼냈다. 이어 지난 생일에 딸과 같이 갔던 일본식 식당 얘기와 몇 달 전에 딸이 보내줘서 아내와 함께 갔던 외국 여행 얘기를 김 씨에게 시시콜콜하게 들려주었다. 도시락을 다 비우고 나서, 득진 씨가 비닐봉지에 담긴 방울토마토를 김 씨에게 권했다. 김 씨는 고개를 내젓더니,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창밖에는 들판 위에 뼈대만 남은 비닐하우스들이 연달아 지나갔다. 득진 씨는 김 씨와 마신 소주 몇 모금에 몸이 노곤했다. 그는 좌석 깊숙이 몸을 기대었다.
버스는 서울역을 지나, 시청 근처에 있는 어느 호텔 앞에서 멈췄다. 사람들은 버스에서 내려 시청 앞 광장을 향해 걸어갔다. 광장에는 큰 연단이 서 있었고, 그 연단 밑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깃발을 들고 있었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은 득진 씨와 나이가 엇비슷해 보였고, 더러는 조금 더 많아 보이기도 했다. 득진 씨와 일행도 광장의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중년의 여자가 쇼핑백에서 작은 깃발을 꺼내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득진 씨와 일행도 깃발을 하나씩 받아서 들었다.
연단 가운데에는 노란 술이 달린 검은 모자에 군복을 입은 노인들 여남은 명이 한 줄로 길게 서 있었다. 그들 앞에서 밝은 정장을 입은 여자가 노래 몇 곡을 연달아 불렀다. 대부분 찬송가의 곡조에 다른 가사를 붙인 노래들이었다. 바닥에 앉은 사람들은 추임새를 넣으며 그 노래들을 따라 불렀다. 이어 연단 위로 올라온 백발의 남자는 목이 찢어져라 소리부터 지르고 나서 연설을 시작했다. 광장에 앉은 사람들은 연설을 듣는 중간중간 깃발을 흔들거나 손뼉을 쳤다. 그 뒤로도 정치인과 언론인을 비롯한 몇 명의 연사가 연단 위에 올라오고 내려갔다. 정해진 순서가 모두 끝나고 뒤쪽에 일렬로 서있던 노인 중 선글라스를 낀 노인이 연단 중앙으로 걸어 나와 사람들에게 광화문 광장으로 행진하기를 요청했다.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행진하기 시작했다.
득진 씨와 일행은 시위 행렬의 중간쯤에 섞였다. 서울은 오래전에 득진 씨가 왔을 때와 많이 변해있었다. 높은 빌딩의 벽면에 붙어 있는 대형 전광판들과 한복을 입은 외국인들, 도심을 가로지르는 인공하천을 따라 한가롭게 걷는 사람들. 득진 씨가 두리번거리며 한눈을 팔고 있을 때, 행렬 뒤편에서는 행진하던 노인들과 그들을 바라보던 젊은이들이 시비가 붙어 서로 고성을 지르고 있었다. 서로의 일행들이 막아서면서 말다툼은 마무리가 되었고, 멈춰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득진 씨도 이내 행렬을 따라잡았다. 그 젊은이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멀어지는 행렬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에는 경멸과 공포가 어려 있었다. 행렬이 광화문 사거리쯤에 이르렀을 때 득진 씨는 조심스레 김 씨에게 말을 꺼냈다.
“화장실 어딨나 알어?“
하지만 김 씨나 일행들이 알 리가 없었다. 득진 씨는 하는 수 없이 홀로 행렬을 빠져나갔다.
거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사람들은 빠르게 지나갔다. 뒤돌아보거나 멈춰 서지 않았다. 그들은 일초도 늦을 수 없다는 듯이, 이기지는 못해도 져 줄 수는 없다는 듯이 자신만의 경주에 빠져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과 맞닥뜨릴 때면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재빠르게 옆으로 피했다. 그들에게는 이러한 일들이 무척이나 익숙해 보였다.
득진 씨는 한참을 헤매다가 멀찍이 있는 공원을 발견했다. 공원 정문으로 들어서자 노인들이 어느 독립운동가의 동상 밑에서 비둘기처럼 쪼그려 앉아서 졸고 있었다. 득진 씨는 정문 바로 왼편에 있는 화장실로 곧장 들어갔다. 화장실을 나와 김 씨에게 전화했지만 김 씨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득진 씨는 노인들이 둥그렇게 모여 있는 공원 한쪽 구석으로 걸어갔다. 노인들은 장기 구경을 하고 있었다. 득진 씨도 그들 뒤에 구부정하게 섰다. 몇 분 지나지 않아 김 씨에게 연락이 왔다. 득진 씨는 옆에 서 있던 노인에게 길을 물었다. 그 노인이 득진 씨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자 이를 쳐다보고 있던 다른 노인들이 손짓을 해가며 길을 알려주었다.
공원은 돌로 된 담장으로 둘려 있었다. 득진 씨는 공원의 정문 밖으로 나와 담장을 따라 걸어갔다. 공원 주변에는 행색이 초라한 노인들이 많았다. 그들은 길가에 있는 오래된 식당이나 이발소 앞에서 담배를 피우기도 했고, 멀뚱히 서서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길모퉁이쯤 후미진 공터에는 포장마차 몇 개가 모여 있었다. 노인들 몇 명이 포장마차 앞에 서서 간단한 안주와 함께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포장마차 한구석에는 만취한 듯 보이는 노인이 바닥에 뻗어 찌부러진 바퀴벌레처럼 움찔거렸다. 긴 머리카락을 반대편으로 넘겨 붙인 노인이 커피를 마시며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득진 씨는 그 노인에게 다가가 한 번 더 길을 확인했다.
악기상가 아래로 지나는 길을 건너니 좀 전에 노인이 말했던 은행이 보였다. 득진 씨는 은행 오른쪽으로 나 있는 거리로 들어섰다. 거리 바닥에는 커다랗고 네모난 돌이 딱 들어맞게 깔려있고, 거리 양쪽에는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늘어서 있었다. 득진 씨는 외국인들 몇 명이 서 있는 골동품 가게 앞으로 걸어갔다. 커다란 배낭을 멘 외국인들은 가게 안에 진열된 물건을 가리키며 얘기를 하고 있었다. 가게 앞에 세워 놓은 접이식 탁자 위에는 엄지손톱만 한 조각들이 얕은 바구니에 가득 담겨있었다. 득진 씨는 거친 손으로 호랑이, 코끼리, 바다거북 모양의 조각들을 하나씩 만져보았다.
득진 씨는 골동품 거리를 지나 한옥으로 된 식당 앞을 지나고 있었다. 그 주변에는 비석을 엎어놓은 것 같이 낮고 넓적한 의자가 군데군데 놓여 있었다. 그는 어느 화랑 앞에 비스듬하게 놓인 의자에 앉았다. 화랑 앞에는 유리창 안쪽으로 커다란 그림이 걸려있었다. 득진 씨는 그림 속의 길고 가늘게 이어진 무수한 선들을 바라보았다. 이따금 노인들의 함성이 아련하게 들리다가 사라졌다.
득진 씨가 집회 장소에 도착했을 때 집회의 열기는 점점 사그라들고 있었다. 연사들 몇 명이 번갈아 가며 같은 연설만 반복하더니, 나중에는 연설을 대신해서 연단 뒤쪽에 설치된 대형 화면에 영상을 틀어주었다. 여전히 거칠게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있었지만, 우두커니 앉아 휴대전화를 쳐다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자리를 뜨는 사람도 점점 늘어갔다. 김 씨는 자리를 떠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깃발을 바닥에 늘어뜨렸다. 득진 씨와 일행도 그 옆에 시무룩하게 앉아 있었다. 그때 연단 위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검은 양복을 입은 그 남자는 눈에 띄게 얼굴이 창백했다. 그는 마이크를 잡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연설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며 그의 말에 점점 몰입되었다. 급기야 남자는 손을 치켜들고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구호를 반복해서 외치기 시작했다. 그 구호는 마치 주문처럼, 되풀이할수록 사람들의 갈비뼈 아래에 웅크리고 있던 무언가를 불러냈다. 그것은 사람들의 몸속을 천천히 기어다니며 꿈틀거렸다. 사람들의 몸을 미친 듯이 흔들어 대더니, 마침내 사람들의 목구멍을 갈기갈기 찢고 뛰쳐나와 집회장을 헤집고 다녔다. 남자는 핏대를 올리며 연설을 계속했다. 대형 스피커에서 튀어나오는 저주의 말은 사람들의 메마른 몸을 채찍처럼 때리며 그들을 일으켜 세웠다. 일련의 사람들이 먼저 앞으로 나아가자, 나머지 사람들도 광기 어린 얼굴로 앞서가는 무리를 뒤따라갔다. 득진 씨의 흐릿하던 눈동자도 광기에 번뜩였다. 그는 일행과 깃발을 흔들며 시위 행렬 속으로 사라졌다.
시위 행렬이 도로에 들어섰을 때 경찰들은 경찰버스와 차단벽을 겹겹이 배치해 길을 막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위 행렬이 점점 다가오자, 경찰들은 그들에게 해산명령을 내린 뒤 버스 앞으로 나와 방패를 들었다. 이윽고 시위 행렬의 맨 앞에 있던 사람들이 깃대와 쇠 파이프를 휘두르며 공격했다. 경찰들도 그들을 막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머리수에 밀려 버스 뒤로 물러섰다. 이에 더욱 기세가 오른 사람들은 길을 막고 있는 버스를 흔들기 시작했다. 몇몇은 버스를 넘어가기 위해 버스 지붕 위로 올라가기도 했다.
득진 씨와 일행은 차벽의 한가운데에 있는 경찰 버스를 밀치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경찰 버스 운전석에 열쇠가 꽂혀있는 것을 발견한 김 씨가 깃발을 묶고 있던 등산용 지팡이로 버스의 유리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갔다. 김 씨는 운전석으로 가서 꽂혀있던 열쇠를 돌렸다. 버스는 검은 연기를 크게 내뱉으며 으르렁거렸다. 김 씨의 버스는 굉음을 내며 앞뒤에 붙어 있던 다른 버스들을 앞뒤로 처박기 시작했다. 버스들이 부서지며 폭풍 속의 고깃배처럼 너울거렸다. 김 씨의 버스는 더욱 거칠게 앞뒤에 붙어 있는 버스들을 밀어냈고, 마침내 버스 사이에 좁은 틈을 만들었다. 득진 씨와 일행은 찌그러진 버스 사이에 차례로 몸을 밀어 넣었다. 버스 사이의 틈은 갈수록 좁아져,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득진 씨의 가슴이 짓눌렸다. 그는 버스의 백미러를 붙잡고 좁은 틈을 겨우 빠져나왔다. 곧바로 다른 일행의 몸을 끌어당겨 한 명씩 틈 밖으로 끄집어냈다. 하지만 버스들로 연결된 또 다른 차벽이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다. 일행 중 한명이 득진 씨의 어깨를 두드리며 차벽의 한쪽 끝에 그늘진 곳을 가리켰다. 어둠속에서 마르고 창백한 손이 마치 그들에게 여기로 오라는 듯 손짓을 하고 있었다. 득진 씨와 일행은 그들에게 손짓하는 어둠을 향해 흔들리는 차벽과 차벽 사이를 천천히 걸어갔다. 그림자 속에서 검은 양복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났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는 맨홀 입구처럼 아스팔트 바닥에 둥그렇게 뚫린 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득진 씨와 일행도 구멍 아래로 이어진 사다리를 밟고 뒤따라 내려갔다. 구멍은 꽤 깊었다. 그 아래는 컴컴한 터널이 길게 뻗어 있었다. 득진 씨가 먼저 축축한 바닥에 발을 내디뎠다. 생선 살이 썩는 냄새와 서늘하고 축축한 공기가 뒤섞여 밀려왔다. 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작은 불빛을 앞에 비췄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남자가 중얼거리는 소리만 어둠속에서 희미하게 들렸다. 그때 득진 씨의 모자 위에 뭔가 툭하고 떨어졌다. 손으로 모자를 더듬었다. 끈적한 액체였다. 그는 고개를 들어 휴대전화기를 터널의 천장에 비췄다. 천장에는 종유석처럼 생긴 뾰족한 돌기가 군데군데 달려 있었고, 돌기 끝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가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득진 씨는 손에 묻은 액체를 바지에 닦고 일행과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를 따라갔다.
득진 씨와 일행은 어느 덧 터널 깊은 곳까지 와있었다. 악취는 갈수록 점점 심해졌고 몇 방울씩 떨어지던 끈적한 액체는 가는 빗줄기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어둠속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던 말소리마저 점점 작아지다 어느 순간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번쩍이던 득진 씨의 눈동자는 다시 뿌옇게 흐려지고, 일행의 얼굴에는 광기 대신 두려움이 드리워졌다. 그들은 그 자리에 멈춰 소리치며 그 남자를 불렀다. 하지만 어떤 소리도 돌아오지 않았다. 득진 씨의 모자챙으로 액체가 뚝뚝 떨어지며 바람막이 위로 흘러내렸다. 잠시 그 자리에서 머뭇거리던 그들은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 그들은 바닥을 철퍽거리며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쯤 지났을 때, 득진 씨는 발이 화끈거리고 따가웠다. 그는 바닥에 반쯤 잠긴 발을 들어 휴대전화기를 비추었다. 반쯤 녹아버린 신발 속에 벌겋게 달아오른 발이 보였다. 득진 씨는 다급하게 휴대전화기의 불빛을 일행에게 비추었다. 일행의 옷과 가방도 끈적한 액체에 녹고 있었다. 그들은 온몸을 뒤덮은 액체를 닦아내며 달리기 시작했다. 컴컴한 터널 속으로 휴대전화기의 하얀 불빛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오래 걸리지 않아, 그들의 신발과 옷은 녹아 없어지고 머리카락과 살갗에서 타들어가는 듯이 연기가 났다.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바닥에 고여 있던 끈적한 액체가 그들의 입속으로 밀려들어 갔다. 그들의 앙상하고 굽은 몸뚱이는 형체가 모두 사라지고 걸쭉한 액체가 되어 터널 끝에 있는 거대한 창자 속으로 천천히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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