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r's Room

숙취

by 김태춘

그가 화장실에서 돌아왔을 때 그녀는 자리에 없었다. 그는 앉아 잠시 무언가를 생각했다. 그는 지하에 있는 주점의 두꺼운 유리문을 열고 계단 위로 올라갔다. 모퉁이에 있는 편의점 앞으로 가서 거리를 둘러보았다.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문을 열자 그곳 특유의 냄새가 히터 바람에 뒤섞여 그의 얼굴 앞으로 천천히 밀려왔다. 그는 입구 가까이에 있던 그의 자리에 앉아 좁고 긴 테이블 위에 두 손을 올렸다. 가게 주인은 입구에 있는 계산대 앞에서 등을 돌리고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그는 진열장 아래에서 돌아가는 전축으로 눈을 돌렸다. 전축의 바늘이 광산에서 곡괭이로 땅을 긁어내는 아프리카인들처럼 음반의 골짜기를 힘겹게 긁고 지나가며 음울한 노래를 토하고 있었다. 그는 높고 무거운 의자를 테이블 쪽으로 좀 더 끌어당겼다. 의자는 바닥을 긁으며 기분 나쁜 소리를 냈다. 그는 얼음이 거의 녹고 없는 밍밍한 술을 단번에 삼키고 주인에게 같은 술을 달라고 했다. 주인이 그의 자리로 다가와 빈 잔을 치우고 축축하게 젖은 종이 받침 위에 술을 올려놓았다. 그가 계산대로 걸어가는 주인에게 말했다.
“노래 신청됩니까?”
“안되는데.”
주인은 여전히 등을 돌린 채로 그에게 말했다. 그때 한 무리의 외국인들이 요란하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주인은 긴 테이블 밖으로 나가 그들에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그는 오랜만에 가게 주인이 웃는 모습을 보았다. 가게 주인과 외국인들은 당구대 옆에 있는 널찍한 탁자에 앉았다. 잠시 뒤 거기에 앉아 있던 외국인 중에 세 명이 주점 왼쪽 끝에 있는 좁고 낮은 무대로 올라갔다. 만들다가 실패한 데킬라 선라이즈 같은 조명이 무대 위에 있는 드럼과 앰프와 잡다한 악기들을 비췄다. 전축에서 회전하던 음반이 서서히 멈추고 바늘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곧 구십 년대 유로하우스 형식의 가라오케 반주가 무대 양옆에 세워져있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외국인들은 마이크를 잡고 노래와 랩을 번갈아 가며 했다. 그는 기름내 나는 눅눅한 팝콘을 씹으며 무대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몇 곡을 더 부른 뒤 낄낄거리며 무대에서 내려와 원래 그들이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술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방금 노래를 불렀던 외국인들 옆에 앉았다. 가게 주인이 노란 턱수염을 길게 기른 외국인과 얘기하다가 그를 힐끗 쳐다봤다. 그는 얼굴이 길쭉하고 은색 실테 안경을 낀 외국인에게 방금 불렀던 노래가 어느 나라의 말인지 물었다.
그는 회색 외투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고 현관문을 열었다. 전등이 켜지고 현관 앞에 있는 그녀의 하얀색 신발을 비췄다. 그는 자신의 신발을 반대쪽 끝에 벗어 놓고 벽에 달린 못에 열쇠를 걸었다. 그는 거실에 가만히 서서 닫혀있는 큰 방의 문을 바라보았다. 현관 입구의 전등이 꺼졌다. 그는 오른쪽에 있는 작은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 조용히 닫았다. 옷가지와 널브러진 물건들을 옆으로 대충 밀어내고 바닥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그는 눈을 감고 혼잣말을 짧게 중얼거렸다.

그는 반쯤 잠이 깨어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마루가 삐걱대는 소리가 들렸다. 곧 현관문의 잠금장치가 쇠로 된 홈을 긁으며 문이 열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쿵 하며 닫혔다. 그는 눈을 뜨고 자신도 모르게 그녀가 한 걸음씩 내딛는 먹먹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대문이 열리고 딸깍하는 소리를 내며 조용히 닫혔다. 창문에 걸린 분홍색 커튼 사이로 햇빛이 가늘게 들어왔다. 그는 다시 잠들기 위해 눈을 감고 옆으로 돌아 누었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커튼 위에는 햇빛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바닥에는 어제의 옷들이 더 오래전에 쌓여있던 옷들 위에 딱정벌레의 허물처럼 놓여있었다. 그는 부엌으로 가서 가스레인지에 물을 끓였다. 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나무 식탁 위에 하얀 잔을 놓고 가루 커피와 물을 부었다. 식탁 옆에 있는 싱크대에는 그릇과 접시들이 잔뜩 쌓여있었다. 그는 커피잔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바람에 덜컹거리는 대문을 바라보았다. 연기를 뱉다 말고 안으로 들어가 창가 옆에 있는 소파에 앉으려다가 다시 부엌으로 갔다. 냉장고에서 며칠 전에 넣어 뒀던 맥주를 꺼냈다. 식탁 위에는 맥주 잔 두개가 놓여있었는데 하나는 노란 맥주가 약간 바닥에 고여 있고 다른 하나는 갈색 맥주가 반쯤 남아 있었다. 그는 반쯤 남은 갈색 맥주를 싱크대에 부어버리고 거기에 맥주를 따랐다. 거품이 유달리 많이 생겨서 거품이 사라지고 나니 맥주는 반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회색 소파에 앉아 맥주를 반 모금 삼키며 어제 일을 떠올려보려고 했다. 별 느낌은 없었다. 어제처럼은 아니었지만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이 처음은 아니었으니까. 그의 몸은 소파 아래로 점점 가라앉았다. 그렇게 막 잠이 들려는 순간 번뜩 잠이 깨면서 하마터면 손에 쥐고 있던 맥주잔을 놓칠 뻔했다. 거실은 어둡고 쌀쌀했다. 창밖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으로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맥주잔 주변을 작은 파리들이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그는 잔을 바닥에 내려놓고 너저분한 방으로 들어갔다.

뒷집에서 들리는 날카로운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그는 잠이 깼다.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뭐라고 말하는지 모를 여자와 남자의 목소리도 번갈아 들렸다. 그는 그 집에 살면서 알고 싶지 않은 사실들을 너무 많이 알게 되었다. 누군가에 대해서 너무 많이 알게 된다는 것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그는 주변에 사는 사람들도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으리라 생각했다. 휴대전화를 켜보니 아직 조금 여유가 있었다. 딱히 잠이 더 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대로 좀 더 누워있기로 했다. 몸이 무거웠다. 속이 쓰리거나 머리가 아픈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머릿속은 또렷했다. 썩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곧 그의 알람이 울리자 그는 일어나 화장실로 가서 머리를 감고 얼굴을 씻었다. 옷을 대충 챙겨 입고 현관 입구에 있는 거울을 보며 가는 머리칼 사이를 이리저리 넘겼다. 그는 구겨져 있는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와 담벼락 아래에 있는 좁고 기다란 화단 옆을 지났다. 그는 대문을 열고 지하철역으로 걸어갔다.

그는 구부정하게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한 손에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바닥에 내려놓고 신발을 벗었다. 두꺼운 남색 외투를 벗어 방 안으로 던져놓고 소파에 앉아 휴대전화의 화면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올해도 그의 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을 기록했고, 어느 나라에서는 가족사진을 찍으러 사진관에 갔던 일가족 모두가 폭발로 사망했다. 시장의 불안정성이 해소되면서 증시는 회복했고, 올해는 유례가 없는 따뜻한 겨울이 될 예정이지만 내일은 올 들어 가장 추운 날이 될 것이다. 그는 휴대전화를 소파와 쿠션 틈 사이에 끼워 넣고 화장실로 가서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틀었다. 미지근한 물이 하얀 세면대 바닥으로 쏟아졌다. 세면대 위에 달린 유리 선반에는 그녀가 놓고 간 칫솔과 작은 플라스틱 통에 담긴 화장품이 있었다. 그는 물을 잠그고 그녀의 물건들을 세면대 아래 있는 휴지통에 넣었다. 그러고는 화장실의 전등을 끄고 거실 바닥에 있는 외투를 입고 현관문을 나섰다.
배가 홀쭉한 달이 멀리 보이는 송신탑 뒤로 떠 있었다. 그는 지하에 있는 주점으로 걸어갔다. 늦가을의 스산한 바람이 그의 옷 속을 파고들었다. 그는 불이 환하게 켜진 편의점을 지나 잠수함이 그려진 벽을 따라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주점에는 외국인 두 명만이 긴 테이블 중간에 서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곱슬머리를 한 주인 대신 키가 작고 눈이 파란 외국 여자가 그에게 눈인사했다. 그는 긴 테이블의 왼쪽 끝에 앉았다. 그가 외국인 직원을 불렀다.
“맥주 주세요.“
“네.“
테이블 안쪽에서 직원이 대답했다. 그는 직원이 잔을 기울여 길쭉한 금색 꼭지를 젖히고 맥주를 따르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녀는 거품을 막대기로 걷어내고 그의 앞에 맥주를 내려놓았다. 그는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맥주는 차가웠지만 시원하지는 않았다. 알코올의 냄새가 목구멍 깊은 곳을 쏘았다. 그는 이내 몇 모금 더 들이켜고 가게 입구 옆에 있는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전축은 멈춰있었고 직원이 노트북으로 노래를 틀고 있었다. 그는 순식간에 잔을 다 비우고 한 잔을 더 주문했다.
“노래 신청할 수 있어요.”
직원이 맥주를 갖다주며 그에게 얘기했다. 그녀는 친절해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노래를 신청할 마음이 없었다. 그는 맥주잔을 들고 중간에 서 있는 외국인들에게 다가갔다. 한 명은 노란 머리에 피부가 하얗고 다른 한 명은 짙은 눈썹에 머리색이 검었지만 둘 다 그들의 손가락만큼 긴 손톱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한 손은 테이블에 올려두고 다른 한 손은 각자의 휴대전화를 쥐고 있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어디서 왔어요?”
머리가 노란 여자가 그들은 러시아에서 왔으며 근처에 있는 대학에 다니고 있다고 그에게 말하며 쥐고 있던 휴대전화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손가락을 펼쳤다. 진한 분홍색 손톱 위에 칠해진 갖가지 꽃 모양이 테이블을 비추는 전등 빛에 반짝거렸다.
“무섭네요.”
그는 그녀의 손톱을 가리키며 말했다.
“만져봐도 돼요.”
머리가 노란 여자가 손톱으로 그의 손등을 부드럽게 긁으며 말했다. 그와 노랑머리의 여자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머리가 검은 여자는 한마디도 없이 휴대전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릿속이 훤히 보일 정도로 짧은 머리에 한쪽에만 귀걸이를 한 남자가 주점으로 들어와서 그들에게 인사를 했다. 그제야 검은 머리 여자가 입을 열었다. 그들은 러시아말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마 가족들을 껴안고 인사를 했을 것이다. 커다란 짐가방을 들고 러시아글자가 적힌 공항에 들어섰을 것이다. 검색대를 지나 비행기 속에서 지루한 시간을 견디고 생소한 글자를 따라 여기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들이 원했던 것이 학생이 되는 것인지 무엇인지 그로서는 알 수가 없지만 그는 그들이 말도 안 되게 긴 손톱 사이에 펜을 쥐고 강의실에서 필기를 하거나 기숙사 침대에 걸터앉아 무릎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숙제를 하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러시아인들이 떠나고 나서도 그는 한참을 빌어먹을 의자에 앉아 술을 마셨다. 사람들이 오고갔다. 새벽 한 시가 넘어가자 주점에는 그와 친절한 직원 둘만 남았고 그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로변에는 택시들이 줄지어있었다. 그는 맨 앞에 있는 노란 택시를 타고 집 앞에 내렸다. 그는 구부정하게 대문을 열었다. 화단에 있는 앙상한 나뭇가지에 말라 붙어 있는 이파리가 바람에 낮게 흔들리며 소리를 냈다. 화단 한쪽에는 그가 이곳으로 이사를 왔을 때 그녀가 선물해 준 선인장이 납작하고 긴 팔을 여러 갈래로 벌리고 서 있었다. 그는 한 쪽 팔을 잡고 당겼다. 선인장의 팔이 마디에서 떨어져 나갔다. 다른 쪽 팔도 쉽게 떨어졌다. 이번에는 굵직한 밑동을 움켜쥐고 힘껏 당겼다. 선인장이 뿌리째 뽑히면서 그 자리엔 작은 구덩이가 생겼다. 그는 신발을 신은 채로 화장실에 들어갔다. 휴지통을 바닥에 뒤엎고 그녀가 놓고 간 물건들을 집어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물건들을 화단의 구덩이 속에 집어넣고 흙을 덮었다.
늦은 새벽에 굵은 비가 창문을 때리는 소리가 잠결에 들렸다. 아침에 부엌에 가보니 창문 밖에서 들이친 비가 바닥에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는 창문을 닫고 걸레로 바닥의 물을 대충 닦아냈다. 그는 신발장에 걸린 검은색 우산을 꺼내 들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별일 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는 아침마다 직장에 나갔고 회의를 했고 점심을 먹고 나면 갖은 방법으로 시간을 때우다가 적당한 시간에 퇴근했다. 일을 마치면 누구를 만나서, 그게 안 될 때는 혼자서 술을 마셨다. 그럼에도 그는 숙취를 별로 느끼지 못했다. 그도 그게 이상했지만 날마다 술을 마실 수 있어서, 취할 수 있어서 좋았다. 술에 얼얼하게 취해 집으로 돌아오면 그는 또 다른 일과를 시작했다. 그녀의 사진들과 그에게 남긴 짧은 메모들은 물론이고 그녀가 입었던 그의 티셔츠와 잠옷과 양말, 그녀가 읽었던 책들까지, 그의 집 구석구석에 배어있는 그녀의 흔적들을 집요하게 찾아내어 하나씩 화단으로 가지고 나갔다. 그때마다 나무와 화초가 뽑혀 나갔고 그 자리에는 그녀의 물건이 묻혔다.

그는 출장을 구실로 시내에 들렀다가 직장에 복귀하지 않고 바로 퇴근해 집으로 왔다. 소파에 앉아 미지근한 캔맥주를 따서 한 모금 마시고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휴대전화의 화면을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넘기다가 돌연 책장 앞으로 가서 꽂혀있는 책 사이사이를 뒤져가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책장 맨 윗줄에 왼쪽 끝에 가려져 있던 작은 수첩을 발견했다. 그는 수첩을 빠르게 넘겼다. 수첩 위에 쌓여 있던 먼지가 흩어졌다. 뒷부분까지 가서야 그녀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페이지가 나왔다. 그는 그 페이지만 찢으려다가 말고 수첩을 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황량한 화단에는 이제 국화 몇 줄기만 남아있었다. 그는 더 이상 북슬북슬하게 피는 노란 꽃을 머릿속에 떠올릴 수가 없었다. 그는 국화가 심어진 곳을 삽으로 찔러 뿌리를 잘라내고 줄기를 잡아당겼다. 국화는 힘없이 뽑혔다. 그는 국화를 시멘트 바닥에 던져버리고 수첩을 화단에 묻었다. 다시 소파에 앉아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맥주는 여전히 미지근했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얼굴을 찡그리지 않았다. 봉지에 들어있던 맥주를 모두 마시고 나서 그는 생각했다. 이제 더 이상 시간 낭비할 일은 없을 것이다. 담배도 끊고, 술도 끊을 수 있을 것이다. 돈도 모아 이 지긋지긋한 집구석을 떠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는 짧게 몸을 떨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비틀거리며 부엌으로 걸어가다가 한쪽 벽에 붙어있는 나무 선반의 모서리에 머리를 찧었다. 머리를 손으로 훑어보니 피가 묻어나왔다. 그는 피를 바지에 닦고 부엌 찬장에서 독한 술을 꺼내왔다. 낮은 잔에 술을 반쯤 따르고 반 모금 정도 삼켰다. 그는 문득 잔을 있는 힘껏 움켜쥐면 어떻게 될까 하는 호기심이 들었다.

퇴근 시간이라 열차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열차가 역에 가까워지자 열차 안의 사람들이 문 앞으로 몰려들었다. 문이 열리고 그는 사람들에 끼여 밖으로 빠져나갔다. 왼쪽의 긴 환승 통로를 지나 비스듬하게 꺾인 계단을 올랐다. 좁은 승강장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열차가 미지근한 바람과 함께 승강장에 다가와 천천히 멈췄다.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은 막무가내로 열차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빽빽한 열차에 오른 사람들은 죄수들처럼 팔을 아래로 내리고 서서 승강장에 남겨진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다음 열차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지하철역 아래에 있는 상가들은 거의 비어있었다. 화장품 가게 간판이 달린 빈 상점 앞에서 그의 학교 후배가 검은색 외투를 입고 검은색 노트북가방을 오른쪽 어깨에 메고 서 있었다. 그녀는 그 근처에 자주 간다는 카페에 관해 얘기하며 그에게 물었다.
“한 십 분 정도 걸어야 하는데 괜찮아요?“
“어. 괜찮아.“
그들은 창가 쪽에 좁은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았다. 그녀는 생강차를, 그는 따뜻한 커피를 시켰다. 그녀가 흐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선배는 여전하네요.”
“오랜만이네.”
그녀 역시 졸린 듯한 눈매가 여전했다. 그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입가에 짙은 주름으로 시선을 옮겼다. 오랜만에 만나면 늘 그렇듯 무슨 일을 하는지, 어디에 사는지 하는 시시한 대화가 이어졌다. 거의 십 년이 가까운 시간 동안 서로에게 많은 일들이 있었을 테지만 그 많은 일들에 대해 다 얘기하려고 생각하니 그는 오히려 할 말이 없었다. 짧은 머리의 여직원이 그들에게 커피와 차를 가져다주었다.
“근데, 선배 좀 변한 것 같아요.”
“어떤 게?”
“그냥 뭔지는 모르겠지만…. 좀 그런 것 같아요.”
“뭐 그렇겠지.”
그는 예전의 자신을 기억해 보려고 했지만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반면에 그녀의 모습은 생생하게 기억났다.
“술은 잘 안 마시니?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나, 친구들이나….”
“먹긴 먹는데, 예전처럼 많이 먹지는 않아요.”
그는 그녀의 대답을 듣고 가볍게 웃으며 뭔가를 말하려다가 입술을 다물었다.
“왜 웃어요?”
“아니, 그냥.”
“저도 많이 변했어요. 요즘 저는 사람을 믿지 않게 되었어요.”
그녀가 찻잔 고리에 검지를 걸고 말했다.
“저는 이제 저 자신만 생각하려고 해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물었다.
“선배는요?”
“뭐?”
“선배는 예전에 술 많이 안 마셨던 거 같은데.”
“그랬나? 나 잘 마시는데. 특히 요즘은…..”
그는 말꼬리를 흐렸다.
“뭔데요?”
그녀는 아까 여전하다고 할 때와 비슷한 종류의 미소를 짧게 지으며 말했다. 그는 하얀색 잔 둘레에 얼룩진 커피 자국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녀에게 말했다.
“저녁 안 먹었지?“
“네, 그런데 지금은 아무것도 못 먹을 것 같아요.”
“어, 그래? 그래.”
그는 목소리의 음색을 조금 높여 그녀에게 대답했다.
그들은 카페를 나와 지하철역 입구에서 헤어졌다. 그는 캄캄한 가로수 사이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외투를 여미고 지하철역으로 들어갔다.

그의 알람도 뒷집 아이의 비명도 들리지 않는 날이었다. 그는 느지막이 일어나 냉장고에 있던 우유를 벌컥거리며 마셨다. 창문 안쪽으로 햇살이 조금 들어와 있었다. 그는 자전거를 가지고 대문 밖으로 나왔다. 자전거는 내리막길을 빠르게 달렸다. 그는 병사들의 묘지를 돌아 바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는 대학교 건물을 지나 해안도로에 이르렀다. 바다는 그리 멀리에 있지 않았다. 그는 콘크리트로 된 육중한 트라이포드 위로 이어진 해안도로를 달렸다.
해수욕장에 사람들이 드문드문 있었다. 그는 해안도로 옆으로 난 인도 한쪽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모래사장으로 걸어갔다. 그의 옆으로 하얀색 원피스를 같이 맞춰 입은 여행객 세 명이 바다 위에 떠 있는 다리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해가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는 바다 가까이 더 다가갔다. 파도가 그의 신발 끝에 닿을 듯이 밀려왔다가 다시 빠져나갔다. 그는 거기에 주저앉아 한동안 파도 소리와 모래와 자갈이 쓸려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이어폰을 끼고 휴대전화로 노래를 틀었다. 비슷한 느낌의 노래들이 연달아 흘러나왔다. 그중에는 익숙한 노래도 있고 낯선 노래도 있었다. 펀디 양 (Fundee Yang)의 르 토 (Le Trou)가 끝나자 느린 비트 위에 전자음이 무겁게 깔렸다. 이어 나오는 여자 가수의 힘없는 목소리는 과도한 잔향과 뒤섞여 귀신의 신음처럼 들렸다. 무척 익숙한 노래였는데 제목이나 가수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웃통을 벗은 아이들이 바다에서 나와 웃으며 서로를 거칠게 밀쳤다. 포즈를 취하던 여행객들은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모래 위에 앉아 조금 전에 찍었던 사진을 넘겨보고 있었다. 그는 바지의 모래를 털고 일어나 자전거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신발이 모래에 푹푹 빠져 그는 우스꽝스럽게 한 발씩 내디디며 모래사장을 빠져나왔다.
모래사장 입구에 나무로 된 넓은 계단에는 사람들 몇 명이 앉아 있었다. 그는 자전거 앞에서 바지 주머니를 손으로 더듬다가 불현듯 멈추고는 굳은 얼굴로 어떤 여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호리호리한 몸에 길고 검은 머리칼을 등 뒤로 넘긴 그 여자는 그가 아는 얼굴처럼 보였다. 그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바다를 쳐다보던 그 여자의 시선이 그에게 향하자 그는 급하게 눈을 돌리고 바지 주머니에서 자전거 열쇠를 꺼냈다. 그는 자전거에 올라 좁고 구부러진 2차선 도로를 따라갔다.
돌아가는 길은 왔던 길보다 더 멀었다. 그는 돌아가는 내내 그녀의 환영에 시달려야 했다. 그 창백한 환영은 가로수 아래에서도, 카페 속에서도, 버스정류장 앞에서도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오르막길을 힘겹게 올라 집 앞에 다다랐을 때, 환영은 대문 앞에 그를 등지고 서 있었다. 그가 자전거를 끌고 대문으로 다가가자 환영은 천천히 옆으로 비켜섰다. 그는 자전거를 담벼락에 기대놓고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옷 속에서 땀이 빗줄기처럼 흘러내리고 속이 메스꺼웠다. 그는 겨우 현관 앞에 몸을 기대고 대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환영은 대문 앞에 서서 가늘고 창백한 손으로 화단을 가리켰다. 그는 마지막으로 수첩을 묻었던 자리를 손으로 파내기 시작했다. 화단 곳곳을 손톱이 거메지도록 파고 뒤적여보았지만 수첩과 그가 묻었던 물건들은커녕 그것들의 작은 파편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마당 한쪽에 세워놓았던 삽을 가지고 와서 화단 밖으로 흙을 퍼냈다. 구덩이는 점점 깊어졌고 그의 상반신만 구덩이 밖으로 드러났다. 그는 잠시 구덩이 속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삽날에 잘린 지렁이의 길고 축축한 몸통이 꿈틀거렸다. 머리 꼭대기에서 흘러내린 땀이 그의 턱 아래로 흘러내려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그는 고개를 들어 화단의 시멘트 울타리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그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환영을 보았다. 환영은 옅은 미소를 짓는 듯이 보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흙에 삽을 꽂아 넣고 더 깊이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흙더미는 화단 밖에 점점 높게 쌓여갔다. 간당간당하게 보이던 그의 모습은 어느새 구덩이 아래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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