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r's Room

찢어진 턱시도

by 김태춘

무슨 소리지. 그는 비명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 비명 너머로 회색 자동차가 21세기적인 소음을 조용히 뱉으며 빠르게 멀어지고 있었다. 그는 가로등의 창백한 불빛 아래에 드리워진 짙은 그림자 속에서 신음하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배가 터져 밖으로 삐져나온 내장은 불규칙적으로 꿈틀대었고 으스러지지 않은 다른 쪽 팔은 허공을 할퀴어댔다. 차가운 아스팔트가 찢어진 턱시도 사이로 흘러나오는 걸쭉한 피를 소리 없이 빨아들였다. 수천 개의 울부짖음과 수만 개의 사이렌 굉음 속에서 그는 고통이 그 너덜너덜한 육신 구석구석을 움켜쥐는 것을 지켜보았다. 가로등의 불빛은 아득히 멀어지고 있었고 그들의 머리 위로 셀 수 없이 솟구치는 폭죽들이 갖가지 모양으로 터지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금세 불꽃도 모두 사그라들었고 마침내 그들은 완전한 어둠 속에 남겨졌다.

방안에 그림자가 낮게 깔리기 시작했다. 그는 잠이 깨고서도 여전히 바닥에 누운 채 누렇게 변한 천장의 벽지 무늬를 한동안 쫓고 있었다. 형이상학적인 무늬의 곡선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무늬 속에 갇히게 되었고 그는 매번 되돌아 나오는 길을 잃고 말았다. 이제 해는 사라지고 구름에만 빛의 붉은 자국이 군데군데 찍혀있었다.
옆집에 사는 노인의 거칠은 기침 소리가 들렸다. 그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웃으며 귀엽게 말을 건네던 그녀는 몇 년 새 표정을 알 수 없는 노인이 되었고 더 이상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기침소리는 곧 땅을 후벼파고 벽을 부수는 중장비의 굉음과 뒤섞였다. 여기도 이제 몇 집 남지 않았다. 남은 몇 집도 가족이 없는 노인들이나 도시에서 밀려나기만을 반복해 온 그와 같은 이들만이 숨죽이며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바닥에서 일어나 대충 얼굴을 적시고 현관으로 나가 그 앞에 빼곡한 화분들을 하나씩 살폈다. 작은 사마귀 한 마리가 동백이파리 위에 몸을 낮게 깔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 대문을 나왔다.
대문밖에는 원래의 용도와 형체도 모를 집기와 가구, 자질구레한 쓰레기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곳에서는 더 이상 아무도 쓰레기를 치우지 않았다. 어차피 여기 남겨진 모든 것은 다 부숴져서 땅에 묻히게 될 테니까. 모든 대문과 담벼락에 벌건 스프레이로 엑스표시가 뿌려졌다. 그는 이정표처럼 이어지는 엑스표를 따라 비탈길을 내려갔다. 길모퉁이에는 퍼런 샷다가 내려진 세탁소 평상에 낡은 슬리퍼를 신은 노인이 앉아 있었다. 담배를 문 노인은 그를 의심스럽게 노려보더니 그가 길 아래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불을 붙였다.
세탁소 아랫동네엔 비교적 크고 깨끗해 보이는 집들이 많았다. 그는 그중에 대문이 뜯겨있는 집을 발견하고는 낮은 계단 몇 개를 올라 그 집으로 들어갔다. 넓은 마당엔 당종려 나무 몇 그루가 2층까지 뻗어 있었고 담장 가에는 하얀색 장미가 가득 피어있었다. 그는 비파나무 아래 떨어져 문드러진 누런 열매의 냄새를 맡아보고는 거실로 들어갔다. 널찍한 거실 바닥엔 버리고 간 살림살이들과 깨진 유리 파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지만, 짙은 갈색 칠이 된 나무가 둘려진 벽과 천장은 여전히 깨끗했다. 위층은 거실에서 계단으로 바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두꺼운 나무 계단을 하나씩 딛고 위층으로 올라가 창가에 쓰러져있는 등나무 의자를 일으켰다. 창문 너머 맞은편 언덕에 빼곡하게 솟은 고층 아파트가 보였다. 아파트의 커다란 사각형 창문엔 드문드문 노란 불빛이 드리워져 있었고 자동차들이 개미처럼 아파트 지하로 줄지어 들어갔다. 그는 빈 하품을 한 번 하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는 전철역 주변의 번화가로 향했다. 도로 위의 차들은 거의 멈춰있다시피 했고 오토바이들만이 차와 차 사이의 좁은 틈새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사거리 건널목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손에 쥔 전화기만 바라보다가 신호가 바뀌자 길 건너편의 상점과 식당으로 순식간에 흩어졌다. 주점 앞에 늘어선 사람들은 전자담배의 차가운 연기를 서로에게 내뿜으며 큰소리로 웃고 떠들었다. 그는 얼른 주점 뒤편의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번화가의 뒤편은 어둡고 축축하고 무기력하게 썩어가고 있었다.
그 더러운 골목은 좀 더 큰 길로 이어졌다. 거기엔 해피빌이니, 조은빌이니, 골든파크니 하는 원룸 건물들이 길을 따라 장의사 가게에 놓여 있는 싸구려 관처럼 지루하게 줄지어 있는 곳이었다. 길가에는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았고 대신 A4용지에 출력한 부동산 광고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콘크리트 전봇대가 몇 블록마다 하나씩 서있을 뿐이었다. 그는 전봇대 앞에 잠시 멈춰서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하나 뜯어서 주머니 속에 넣었다.
길 끝에는 편의점과 대형 스크린 골프장이 마주 보고 있었다. 그는 골프장 앞 도로 건너편에 있는 작은 숲으로 가기로 했다. 숲길은 무성한 나뭇잎들과 아직 켜지지 않은 가로등 탓에 캄캄했다. 그는 잠시 사람들 발에 밟혀 납작하게 말라버린 지렁이 옆으로 천천히 기어가는 지렁이를 툭 건드렸다. 그러고는 나무 아래 길게 자란 풀 사이로 묘비처럼 박혀 있는 둥그런 조각상 위에 앉았다. 그리고 숲의 냄새를 깊게 들이마셨다. 그 옆으로 크고 작은 몇 마리의 개들이 사람들 손에 이끌려 지나갔다.
숲길길이 거의 끝날 때쯤 가로등에 불이 들어왔다. 그는 오른쪽에 있는 묘지의 울타리 아래 인적이 드문 배수로로 걸어갔다. 배수로는 묘지 귀퉁이에서 인공 냇가로 이어졌다. 냇물은 언제 멈췄는지 더 이상 흐르지 않아 악취를 풍겼고 물고기는커녕 검게 변한 수초들만 미친 여인의 머리칼같이 어지럽게 헝클어져 있었다.
그는 냇가와 이어지는 묘지의 주차장을 지나 터널을 건너기 위해 작은 계단을 올랐다. 계단에 오르니 묘지의 울타리 안쪽에 가지가 둥글게 정리된 나무들과 네모난 연못 사이로 병사들의 무덤이 어슴푸레 보였다. 조금 더 올라가자 환하게 조명이 켜진 넓은 풀밭이 있었다. 노인들이 팔을 흐느적거리며 그 풀밭 위를 천천히 걷고 있었고 한쪽 편의 운동기구들은 고장 난 기계처럼 삐그덕거리며 원을 그렸다. 그는 길고 칠이 벗겨진 나무 의자에 앉아 한참 동안 그들을 쳐다보았다. 문득 그는 허기를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도 도로는 여전히 차들로 가득했고 그 한복판에 병사들의 위령탑이 포위되어 있었다. 그는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며 배낭과 깃발을 들고 행군하는 병사들의 조각상을 잠시 바라보았다. 묘지 반대편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서 그가 가던 지름길은 높고 투명한 담벼락에 가로막혔다. 마침, 자전거를 끌고 밖으로 나오는 여자아이를 발견하고 그 틈에 그는 겨우 안으로 들어갔다. 아파트는 무척 조용했다. 정원에 떨어지는 인공폭포의 물소리 말고는 사람들이 설거지하며 접시가 부딪치는 소리라든지 칼이 도마에 부딪히는 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원색으로 꾸며 놓은 놀이터에 엄마와 놀이기구를 타는 아이들마저 별말이 없었다. 그는 조용히 아파트를 가로질러 다시 투명한 담장 밖으로 나왔다.
그는 경사진 언덕을 천천히 올랐다. 진작에 부서진 집들의 잔해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포크레인 너머로 불이 켜진 집들이 듬성듬성 보였다. 그는 주머니 속에 있던 종이를 손에 쥐었다가 꺼내서 시커먼 잔해 속으로 던졌다. 지나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차가 막히는 도로를 피해 언덕길을 넘는 차들만 이따금 속도를 내며 지나갈 뿐이었다.
그의 집이 있는 골목에 다다랐을 때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느라 어둠 속에서 그에게 다가오는 무언가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눈치챘을 땐 이미 거대한 손이 그의 목을 잡고 올가미처럼 죄고 있었다. 그는 온몸을 뒤틀면서 버둥거렸다. 그러나 그의 목을 움켜쥔 그 손은 훨씬 두껍고 단단했다. 그의 커다란 두 눈은 점점 붉게 물들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이빨로 있는 힘껏 그 손을 물어뜯었다. 그 거대한 손이 잠시 멈칫거리는 사이 그는 겨우 손아귀에서 빠져나와 골목 반대편으로 내달렸다. 그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온몸에 털을 곤두세우고 미로 같은 골목 사이를 달렸다. 막다른 골목으로 접어들자, 낡은 집으로 기어들어가 몸을 숨겼다. 하지만 그 희고 거대한 손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그가 숨어 있는 쪽으로 여유 있게 움직였다. 곧 그는 무언가 점점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아직 진정한 밤은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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