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r's Room

<반도> 바이러스

by 유재필

영화 <반도>를 보고 극장에서 나왔을 때의 벅찬 감동을 기억한다. 식당에서 만족스러운 한 끼를 먹고 나올 때의 기분 좋은 포만감 같은 거라고 할까. 좋아하는 음악가의 앨범을 기다리는 팬심처럼 개봉 당일을 손꼽아 기다렸다가 <반도>로 향했다. <부산행>으로 부푼 기대가 혹여나 실망으로 이어질까 봐 걱정도 했지만, 다행히 모든 게 좋았다. <반도>를 통해 처음 알게 된 구교환 배우의 (이제껏 이런 배우가 있었나 싶을 정도의 신선한) 매력도, 매드맥스를 오마주한 듯한 미친 자동차 액션도, 그리고 <부산행> 이후 종말이 덮친 한국의 모습을 상상하고 그려낸 부분까지 이보다 좋을 수 없을 만큼 완벽했다. 얼마나 푹 빠졌냐면 (나중에 대단한 착각임을 깨닫지만) 이건 무조건 천만 영화라고 확신했을 정도였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시종일관 스크린 속을 종횡무진 누비고 다녔던 기아 모하비 차량이 심상치 않게 보였다. 다음날 기아 주식을 사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곧 <반도>가 한류를 타고 반도를 벗어나 물 건너 대륙을 넘어 날아갈 일만 남았고, 기아 주식의 차트도 아름답게 이륙할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당시 기아 주식을 꽤 주문했지만, 영화에 관한 생각이 커다란 오판이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며칠 걸리지 않았다. 아무튼 영화평과는 상관없이 그때 기아 주식을 계속 가지고 있어야 했는데, 하… <반도> 덕분에 찾아온 일생일대의 대운을 몰라본 채 반의반의 반도 누리지 못하고 그대로 차버렸으니 아직도 그 생각만 하면 무척 속이 쓰리다.

말한 바처럼 <반도>에 대해서 굉장한 착각 했음을 알게 된 것은 며칠이 지나서였다. 그날은 당시 다니던 회사에서 점심 회식이 잡혀있는 날이었다. 식당에서 주문을 하고 음식을 기다리는 사이에 대표가 <반도> 봤냐면서 말문을 열었다. 아무래도 <부산행> 이후 몇 년 만에 나온 후속작이라서 그런지 모두 관심이 많았던 듯 자리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 영화를 봤었다. 그런데 대표가 자신의 감상을 말하는데 급발진해서 <반도>를 신랄하게 까는 거였다. 졸작이다. 돈 아깝다. 흔히 망작을 비교할 때의 클리셰 같은 <클레멘타인>을 갖다 대기도 했다. 평소 이런 사람이었나. 자신이 싫어하는 걸 말할 때 힘이 불끈 솟는 사람 같았다. 그리고 제발 대표의 장단을 맞추기 위한 영혼 없는 호응이길 바라지만, 실망스럽게도 자리에 있던 대부분이 대표와 같은 반응이었다. 한 마디로 나 빼고 모두 더럽게 재미없이 본 영화였던 것이다. <반도>를 그렇게 봤다고? 나는 당황했다. 목덜미가 서서히 더워지며, 귀밑머리에서 땀방울이 하나둘 타고 내렸다. 체할 것 같은 불편한 영화 감상이 테이블 위로 떠다니는 중에, 혹시나 내게도 물어볼까 봐 가시방석에 앉은 느낌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저는 정말 재밌게 봤다’고 말했다간, 회사에 수상한 놈이 있다는 소문이 퍼져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나는 모두가 ‘예스(Yes)’할 때 ‘노(No)’라고 할 수 있는 놈이라고 자부했는데, 그 순간만큼은 도저히 그럴 자신이 없었다. 결국 나도 ‘별로였어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심정처럼 재밌게 본 걸 재밌게 봤다고 말하지 못하며 세상과 비참한 타협을 하고 말았다. 무슨 내가 간첩도 아니고, 그 무리 속에서 (반도를 재밌게 본) 나의 정체를 끝까지 숨긴 채, 음식이 입으로 들어갔는지 코로 들어갔는지 모를 식사를 마쳤다.

사실 중요한 건 그날 이후부터다. 마치 여행지에서 원인 모를 바이러스에 감염이라도 된 듯, 나는 이 <반도> 사건 이후로 내가 본 영화들은 주변에서 전부 재미없다고 하는 기이한 증상으로 시름시름 아파온 것이다. (분명 <반도> 이후부터라고 확신하지만, 사실 이전부터 쭈욱 그래왔을지는 모른다.) 어느 날은 아는 형이 최근에 봤던 괜찮은 영화를 물어보길래, 나는 <해빙>을 추천했다. 그런데 얼마 뒤 그 형으로부터 <반도>와 같은 반응이 돌아왔다. 그리고 비교적 최근에는 하정우 주연의 <브로큰>이 좋았다고 어떤 이에게 말했더니, 나를 믿고 <브로큰>을 본 그 분에게 나의 영화 안목과 취향이 잘근잘근 씹히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모두 열거할 수 없지만, 그동안 이런 일이 수두룩하다. 물론 운이 없어서 취향이 동떨어진 사람들만을 골라 만나 그럴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의 평은 어떤가 싶어서, 검색 엔진으로 반응을 살펴보면 대체로 평점 7점을 넘기는 영화가 없다. 그리고 관람평은 대부분 이런 과격한 분위기다. ‘내 생에 최악의 영화~~’, ‘저는 버렸지만 여러분의 시간과 돈을 아끼세요!’, ‘이거 볼 돈으로 국밥 특대 사드세요’, ‘아 돌려내라 내 영화비’, ‘별로별로별로’ ‘별 한 개도 아깝네요’ 뭐 이런 반응으로 도배 되어있다. 이쯤 되면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는 걸 수긍해야 한다. 하지만 나를 더 슬프게 하는 건 이같은 일이 반복되자, 이제 주변에서 최근에 재밌게 본 영화를 물어보는 이유가 그 영화만큼은 피하고자 나를 악용하더라는 것이다. 내게 ‘재미없없던 영화’를 물어보고 그 영화를 안 보는 것과, ‘재미있었던 영화’를 물어보고 그 영화를 피하는 것은, 내 입장에서 기분이 천지 차이지 않은가.
재미있는 영화를 고르기 위해서 우선 일차적으로 유재필의 영화 추천을 마치 정수기처럼 걸러내는 것이다. 누구에게도 시간은 소중하니깐. 괜히 재미없는 영화로 시간 낭비하면 안 되니깐 말이다. 이렇게 본의 아니게 필터로 활용되면서 주변에 도움을 준다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일까. 어찌 되었든 나로서는 무척 씁쓸한 기분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재미있었던 영화’를 물어보면, 반대로 ‘재미없었던 영화’를 말해주면 되지 않을까 생각도 했지만, 내가 재미없게 봤다고 해서 상대방에게 재밌을 거란 보장 역시 없다. 여하간 나는 정말 영화를 모르는 사람이구나 싶다. 그리고 영화 추천 같은 건, 그 세계에 이동진 같은 위인이 있는데 내가 뭐라고 영화를 추천하나. 이제 영화 추천은 물론, 어떤 영화를 재밌게 봤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 나의 이 원인 모를 바이러스 때문에 그동안 나의 소중한 취향이 조롱 당하면서 마음이 시름시름 병들어 왔다. 그렇기에 이제 추천은커녕 단순히 ‘재밌게 봤다’고 말하는 것에도 몸을 사리는 중이다. 아무튼 이동진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사람들이 모두 반도를 욕할 때 유일하게 <반도>를 좋게 말해 준 사람이 이동진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이 세상에 유일한 내 편처럼 느껴졌다. 여담이지만 나는 이동진을 무척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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