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r's Room

최고의 선물

by 유재필

다시 한번 버리는 이야기다. 책뿐만 아니라 최근 몇 년간 쳐다본 적 없고, 앞으로도 사용할 일 없을 것 같은 건 모조리 버리고 있다. 살벌한 단속반의 눈으로 집 안 곳곳을 검열하며, 버려야 할 대상을 색출하는 게 일과가 되었다. 책, 옷, 소품 등속이 줄줄이 나온다. ‘넌 누구냐?’고 묻고 싶은 물건들이 그동안 어딘가에서 잘도 숨어 살다가 하나씩 모습을 드러낸다. ‘이런 걸 샀다니, 돈이 썩어 돌았구나’ 싶은 잡동사니와, 상부 장과 하부 장을 열면 마트에서 매번 없는 줄 알고 샀던 식용유가 유통기한 지난 채 몇 개씩 튀어나온다. 처형하듯 쓰레기통에 던져넣거나, 당근으로 떠나보내면서 작별 인사를 건넨다. 어쩐지 정리 해고되는 듯한 뒷모습에 쓸쓸하지만, 어쩔 수 있나. 쓸모없어지면 버려지는 게 이 비정한 세상의 생리 아닌가.

왜 이렇게까지 물건을 줄이냐면 세간에 유행하는 미니멀리즘을 흉내 내려는 것은 아니다. 내 처지를 알 사람은 아는 소리겠지만, 망했다. 아주. 완전히. 왜 티비에서 한 번쯤은 봤을 법한 쓰레기 집들 있지 않은가. 딱 그게 현재 내 모습인 것 같다. 수고로워도 하나하나씩 비워내야 한다. 주변도, 머리도 번잡하게 만드는 모든 물건과 기억을 정리해야만 한다. 이제 몸뚱아리 하나 누울 수 있는 집만 있는 것으로 정말로 감사하다. 손아귀에서 놓지 못하고 이런저런 물건들 끌고 다닐 수 없다. 바닥에 주저앉아보니 바라는 건 하나다. 거미줄에 걸려있는 듯한 이 삶, 이 답답한 그물만 풀었으면 하는 기분. 목욕탕에 몸을 담그고, 오래동안 묵은때를 벗겨내고, 면도도 하고, 이발도 하고 그렇게 깔끔해지면, 뭐라도 해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단지 그 이유다.

다행히도 물건을 걷어낼수록, 마음이 안정되는 기분이다. 그런데 버려 나가면서, 참 버리기 힘든 물건들을 맞닥뜨리는 데 그건 바로 선물이다. 버릴려고 집어 들면 가차 없이 그 선물을 주었던 얼굴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표정을 지은 채 떠오른다. 그 선물이 절대 쓰레기라서 버리는 건 아니지만, 버리고자 하면 확실히 내가 쓰레기가 되는 기분은 확실하다. 이를테면 일면 있는 작가의 책 또는 그림 작품이라면 더욱 그렇다. 특히 손 글씨 편지처럼 지난날 누군가의 마음과 정성이 담긴 물건인 경우엔 왠지 내가 쓰레기보다 못한 인간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이라, 손 편지야 말로 극강의 난이도처럼 느껴진다.

(*유튜브에서 어느 미니멀리스트의 제시하는 방법에 따르면 손 편지 같이 버리기 어려운 물건은 사진을 찍어서 클라우드에 보관하여 그 손 글씨에 해당하는 상대방의 마음과 추억을 오래오래 보관한다고 한다. 그럴싸한 방법이군 했지만, 그래도 나는 손 편지와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만큼은 차마 버리지 못하겠더라.)

최근에는 책방에 손님으로 자주 왔던 분을 만나 밥을 먹은 적이 있다. 그런데 아이고~~ 그냥 오시지, 만나는 자리에서 무언가 선물 박스를 주셨다. 집에 와서 포장을 뜯어보니 바디로션, 바디워시 세트였다. 패키지만 봐도 비싸 보이는 물건이었다. 처음 듣는 브랜드라서 검색해 보니 10만 원이 넘는 제품이었다. 평소 오이 비누 하나로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가락 사이까지 해결할 수 있는 나에게, 이런 과분한 선물을 주시다니. 선물이 아니었다면 분명 죽을 때까지 써볼 일 없을 물건이었다. 하지만 비싼 스테이크도 썰어본 놈이 썰 줄 안다고, 그 비싼 걸 도통 몸에 바를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렇게 어쩌지 어쩌지 하다가 욕실 수납장에서 한동안 그대로 놓여있다가 결국은 다 쓰긴 했지만 말이다.

이제까지 받은 선물을 떠올려본다. 전혀 취향이 아닌 옷도 있고, 완전 관심 없는 분야의 책을 생일 선물이라고 주면서, (친한 친구라는 놈이 나를 이렇게 모르나 싶어) 나를 난감하게 만든 일도 떠오른다. 어쨌든 당시 나의 취향, 필요 유무를 떠나서 선물이라는 건 그 자체로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고마웠던 마음 때문이라도 쉽게 정리하지 못하고 오랜 시간 방치되는 물건을 보면 고민이 된다. 당연히 선물이라면 무엇이든 고맙다. 하지만 바디로션처럼 내용물을 다 쓰고 버려도 되는 물건이라면 괜찮지만, 지금 내 상황처럼 여러 물건을 정리하는 입장에서, 그동안 받은 선물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난감함이다.

이렇게 적고 보니, 참 선물하기 까다로운 인간처럼 보일 것 같다. 하지만 내게도 최근 잊을 수 없는 선물이 있다. 지난 2024년 연말에 ‘안단테’ 사장님들이 집에 초대해 주셔서 함께 했던 식사였다. 집에 들어서니 몇 시간이나 쓸고 닦고 정리했을까 싶을 만큼 깔끔하고, 정돈된 아름다운 집 내부가 펼쳐졌다. 고작 나 같은 누추한 인간을 맞이하기 위해, 몇 시간이나 정성을 쏟으며 준비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자, 그 아름다운 집만큼이나, 그 마음이 눈부시게 느껴졌다. 손에 잡히는 물성은 없지만 단언컨대 내가 받았던 가장 큰마음이자 고마운 선물이었다. 거실을 지나서 부엌 테이블에는 눈이 돌아가는 음식과 처음 보는 와인으로 파인 다이닝이 펼쳐졌다. 그 순간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마침, 그 무렵 즐겨듣던 역사 주제를 다루는 팟캐스트에서 88 서울 올림픽이 전 세계 사람을 한국으로 초대하는 국가적인 초대, 말하자면 88 서울 올림픽을 ‘메가 이벤트’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러니깐 그때의 식사는 나에겐 정말 메가 이벤트, 최고의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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