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r's Room

니가 너무 한심하다

by 유재필

그러니깐 오랜만에 찾은 부모님 집에서 그런 소리를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무 생각 없이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다가, 아무 생각 없이 멈춘 예능 재방송을, 아무 생각 없이 보던 중에 한쪽에서 나를 보고 있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아버지가 나를 무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여태껏 아버지의 저런 눈을 본 적 있었나. 아무 생각 없이 있다가, 순식간에 생각이 복잡해졌다.

“재필아 이리와서 앉아 봐라. 할 말이 있다.”

‘할 말?’ 어쩐지 서늘한 전운이 묻어있는 심상치 않았던 눈엔 역시 이유가 있었구나. 그 눈빛과 부딪히는 짧은 찰나에 읽어냈지만, 무언가 상당한 각오를 해야 함이 확실했다. 도대체 무슨 말일까.

“나는 니가 너무 한심하다.”

방금 머리를 뚫고 지나간 게 뭐지. 잘못 들은 거겠지. 귀에 뭔가 벌레 한 마리가 들어간 것일지도. 두 눈이 의심될 땐 눈을 비벼보겠는데, 귀를 털어보아도, 귓속에서 맴돌며 내 감정을 방망이질 하는 말이 ‘니 가 너 무 한 심 하 다‘가 분명했다. 머리를 한 대 세게 맞은 기분이었다. 자식한테 ‘한심하다’라는 말을 저렇게 쉽게 할 수 있나 보다는, 굳이 왜 한심한지 이유를 따져 묻지 않아도, 그래, 맞지, 내가 생각해도 내 꼴이 너무나 한심한 상황에서, 한치의 오차 없이 정확한 말을 명치에 쏘아 넣으며 확인 사살하는 사람이 하필이면 아버지라는 사실이 정말로 비참했다. 이런 소리는 시험공부는 내팽겨치고, 게임에나 빠져있는 철부지 고딩 때나 들을 법한 말인데, 불혹인 자식이 팔순인 아버지께 듣고 있으니. 어쩐지 사십까지 걸어온 짧은 내 인생의 역사가 길바닥에 무참히 패대기쳐지는 듯한 서러움이었다.

‘한심하다’ 뒤에 아버지의 물음이 이어졌다.

“함 이야기해보자. 빚쟁이 돼서 이혼하고 부산가가꼬 뭐 해 먹고 살라 그라노? 니 계획을 들어보자”

‘계획이라…’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계획이 있었다면, 부모님 집 거실에서 아무 생각없이 채널이나 돌리며, 한가하게 예능 재방송이나 보고 있진 않겠지. 영화 속 대사처럼 ‘아들아,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소리를 들었으면 좋겠지만, 도망쳐 나오기 바빴던 놈에게 무슨 계획이 있겠는가. 그리고 계획이라는 것도 계획대로 뭐라도 해 본 놈이나 하는 게 아닐까. 근심 가득한 아버지의 얼굴 앞에서 ‘어떻게든 되겠죠’ 따위의 한심한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한심한 인간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아버지의 본론이 이어졌다.

“내가 창피해서 그렇다. 내 나이 이제 팔십인데, 자식이라곤 아들 새끼 하나 있는 놈은 이혼하고… (한숨) 내 사촌 동생들은 벌써 손주, 손녀 데리고 내한테 인사하러 오면, 내가 진짜 면이 안 서고 쪽팔려서 진짜… (한숨)”

살아오면서 내가 들은 가장 무거운 한숨이었다. 아버지가 던지는 말에 계속 쥐어 터지고만 있으니, 나도 서글픈 감정이 끓어올라서 도저히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있을 수만 없었다. 나도 당당히 내 생각을 말했다.

“아버지 역시 살면서 이런 (한심한) 아들을 낳게 될 거라는 계획이 있었습니까. 아버지도 이런 계획은 없었지 않습니까. 저보다 아버지가 갑절은 더 사셨으니깐 충분히 이해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더군요. 저도 하던 일이 망하고, 결혼 생활도 빠그러지는 이런 계획은 제 인생에 그려넣지 않았습니다. 살면서 느껴보니 계획대로 되려면, 내 의지, 노력의 크기보다는 운이 따라주느냐, 안 따르냐 그게 9할을 차지하는 것 같습니다. 한심한 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세상만사 모든 게 운빨인 것 같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아버지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자식을 낳으면서 다가올 수 있는 불행은 대부분 피해 가지 않았는지요. 제가 보기엔 정말로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거죠. 예컨대 제가 이제까지 커오면서 큰 병치레를 한 적이 있나요? 아픈 자식 때문에 말할 수 없는 마음고생은 물론, 병원비, 치료비로 돈이 수두룩 깨지는 부모의 고통 소리가 세상에 왕왕 들리지 않습니까? 저는 아버지, 어머니 우리 가족이 다행히 지금까지 건강하게 지내왔고, 이만하면 저희는 정말 운이 좋은 거 아닙니까. 이런 운은 아버지 계획에 있었나요?

그리고 제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범죄자가 되어서, 뉴스에 머그샷이나 찍힌 꼴로 나온다면, 아버지, 어머니는 동네에서 고개도 못 들고 다녔을 텐데, 다행히 자식새끼 하나 있는 게 그런 골 아픈 놈으로 태어나진 않았습니다. 이것도 운이라면 정말 큰 행운이죠.

또 뭐가 있을까요. 갑자기 제 자랑을 들이대는 건 아니지만, 입학하고 졸업할 때까지 대학교 등록금, 집세, 생활비뿐만 아니라, 스무 살 이후로 한 번이라도 집에 돈 달라고 해본 적 없지 않습니까? 이만하면 부모 입장에선 자식 하나 그저 꽁으로 키운 셈 아닌가요?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요. 비극적인 불의의 사고도 겪지 않았고, 아직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감사하게 주어진 건강을 방구석에서 놀고먹으며 뒹구는 데 쓰지 않고, 쌔빠지게 뛰어다니면서 빚 갚으며 정신 줄 붙든 채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자식을 낳고 키우면서 닥칠 수 있는 큰 불행들은 모두 비껴간 셈이잖아요. 이 모든 게 아버지의 계획이 아니었음에도 이런 불행을 피해 갈 수 있었던 건 행운이라면 정말 큰 행운이 아닐까요? 그러니깐 제 말은 아버지가 친척들 만나서 면이 안 선다거나 그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여태껏 로또 같은 대박 행운은 없었지만, 나름 상당히 운 좋았던 괜찮은 인생이라는 겁니다.”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한 대 처맞을까 봐 입 밖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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