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마친 후 집으로 돌아오면 매일 조금씩이라도 글을 쓰자며 마음을 다잡아도, 오랜 시간 권태에 찌들고 삭은 몸뚱아리는 곧장 침대나 소파를 향해 쓰러진다. 사는 것도 고된데, 잘하지도 못하는 (글 쓰는) 이 짓을 왜 붙잡고 있는지 (인간 유재필이) 참 지긋지긋하다. 한가지 다행이라면 글은 형편없어도 주제 파악은 잘해서, 이제는 감히 글로 돈 벌어보겠다는 욕망이 발기되지 않는다. 과거 어느 날 무엇에 혹해서 이 짓에 빠졌는지 의문이다. 만약 내게 들리는 속삭임이 신의 계시나 영적인 부름 같은 것이었다면, 이 따위 글이 나올 일은 만무할 텐데. 내 손목을 붙들고 가는 존재는 귀신이 분명하고 귀신 중에서도 잡귀가 확실하다. 어쩐지 지금까지 마귀의 속삭임에 홀려 헤매다가 인생이 길을 잃어버린 기분이다.
책상 앞에서 이 낭비라고밖에 할 수 없는 시간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양치라던가, 윗몸 일으키기 같은 일상 활동 정도로 생각해도 그만이지만, 양치나 윗몸 일으키기를 몇 시간씩이나 하진 않는다. 그리고 양치나 운동은 노동이 아니다. 돈과 상관없이 누구나가 하는 일이다. 돈도 못 받는데 왜 이 짓을 하냐며 묻지 않는다. 글은 그렇지 않다. 글은 노동이며, 돈이 안 된다면 왜 이것에 매달리는지 의문을 품게 된다. 책상에 앉을 때마다 자연스레 죄짓는 기분에 발을 담그게 되면서 정신 건강에도 좋지 않다. 그리고 양치나, 운동은 하면 할수록 건강을 지켜주지만, 글 쓴답시고 장시간 앉아 있으면 허리 건강에도 좋을 리 없다. 그리고 잘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를 무식하게 쥐어짜고 있는 것만큼 노화를 앞당기는 일도 없을 것이다.
동기가 사라졌다. 그래도 이, 삼십 대에는 내가 오래 배우고 (그나마) 잘했던 디자인이라던가, 또는 좋아하는 글쓰기로 유명해지고 싶은 열망도 있었고, 여자에게 호감을 얻고 싶다던가, 돈을 많이 벌고 싶은 동기가 분명했었다. 말하고 보니 정말 형편없는 동기지만, 어쨌든 그것들이 계속 이어 나가고 잘하고 싶게 만드는 활력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동기가 사라졌다. 이십 대 시절부터 링 위에서 숱하게 패배만 해온 복서가 마흔이 넘어서도 챔피언의 꿈을 꿀 수 있을까. 그에게 어떤 동기가 남을 수 있을까.
글 쓰는 순간마다 어쩔 수 없는 불편한 기분이 목까지 차오른다. 과연 읽는 사람은 있나 모르겠고, 뚜렷한 주제를 갖고 책으로 엮어야지 하는 계획도 없어서 쓰는 글마다 중구난방이고 넋두리 일색이다. 누구한테 원고료를 받아서 쓰는 글도 아니다. 시간을 이렇게 쓰다니. 자본주의 세상에서 마땅히 손가락질받을 일이다. 그리고 현재 내가 정상적인 상황인가. 빚쟁이 새끼가 말이다. 이런 쓸모없는 글이나 쓸 바에야, 노가다 가서 몸빵이라도 때움이 맞는데 현실 감각이 전혀 없다. 글을 쓸 때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중얼거리게 된다. 요즘은 자주 ‘도대체 왜 그러고 사세요?’ 하는 환청이 두통처럼 들려온다. 왜 이러고 사는지 골똘히 생각해 본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제목 ‘어쩔 수가 없다’라는 말이 머릿속을 지나간다. 어쩔 수도 없고, 왜 이러는지 대책도 없다. 계획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젠장.
그런 생각으로 의기소침해진 상태의 어느 정오의 날, 길을 걷던 중 돗자리를 깔고 앉아 수세미를 파는 할머니를 보게 되었다. 할머니가 뜨개질로 손수 만든 알록달록한 동물 모양의 수세미들이 눈 부신 햇빛 아래서 숨죽여 반짝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내 글이 저 수세미들과 성향이 비슷한 친구처럼 느껴졌다. 등단을 통한 문예지에 실린 글이 백화점의 명품관에 놓여있는 것이라면, 내 글에 딱 맞는 자리는 역시 지하철 주변 길거리 구석진 좌판에 어울린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대부분 사람에게 할머니와 수세미의 풍경이 바쁜 발길 속에 묻히지만, 꼭 어느 한두 명 정도는 그 촌스러운 반짝임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발걸음이 있다. 그러다 돗자리 앞에 쪼그려 앉아 가까이서 보기라도 하면, ‘할머니가 재주도 좋네’ 하며 소소한 감탄이 터지게 된다. 그러다 대단한 물건이 아니지만, 누구의 집에라도 하나쯤은 필요한 그것을 구매하기도 한다.
예전에 어느 이는 내 책을 똥 쌀 때 시원하게 읽히는 그 가벼움이 좋아서, 책장이 아니라 화장실 선반에 둔다고 했다. 흔히 에세이를 통해 기대하는 삶의 깊은 통찰 또는 사회적 현안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이라던가, 품위가 깃든 유머 같은 것은 밥 말아 먹었지만, 똥 싸면서 피식거리게 되는 뭐랄까, 저렴한 맛이 좋다는 것이다. 나는 그 저렴한 맛이 내 귀에 이를테면 싸구려 믹스커피 정도로 들렸고, 왠지 그 말이 좋았다. 어쩌면 나는 누군가를 피식거리게 하기 위해 글을 쓰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이가 싸구려 수세미의 반짝임 앞에서 걸음이 멈추듯, 나도 누군가가 내 글에 잠시 눈을 멈춰서 피식거리는 순간 얼굴에 피어나는 짧은 반짝임을 상상하며 글을 쓴 적이 있는 것 같다. 할머니들은 무슨 상상을 하며 수세미를 뜨는지는 모르겠다. 한 번도 뜨개질을 해본 적이 없어서, 뜨개질하는 마음은 어떤 모양인가 짐작이 안 간다. 다만 할머니들도 길 가던 사람이 잠시 쪼그려 앉아 물건에 하나하나 관심을 보일 때 얼굴에서 피어나는 자잘한 감탄이 뜨개질을 하는 힘이나 동기가 아닐지.
나도 지금 생각해 보니 어쩌면 그 피식거림이 내 글의 동기가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