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우연히 무라카미 하루키에 관한 에피소드를 듣게 되었다. 레이먼드 카버의 팬이었던 하루키가 그를 만나고 싶어, 카버의 집 앞에 무작정 찾아갔다는 이야기였다. 세계적인 대작가도 중고딩 아이들처럼 자신만의 아이돌 집까지 쫓아간 팬심을 떠올려 보니 (일반인과는 다른 세상 속에 살 것 같은 유명인도 별거 없구만, 하는 생각에) 괜히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이왕 집까지 찾아갔으면 초인종이라도 눌러보던가. 아니지, 누르는 순간 스토커로 신고되는 건가. 아무튼 집 앞에 차를 세워 두고 카버가 집 밖으로 나올 때까지 무턱대고 차 안에서 기다렸다고 한다. 그러니깐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유명한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이다.
그 에피소드를 듣자 약간 뜨끔하며 옛 생각이 났다. 나 역시 십여 년 전쯤 최민석 작가를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그가 글을 쓰러 자주 간다는 상수역 인근 카페로 무작정 찾아간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섯 평 정도 될까 싶은 작은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운 좋게도 마침 최민석 작가가 앉아 있었다. 그는 노트북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집중해서 글을 쓰는 중이었다. 그리고 나도, 그러한 작가의 뒷모습을 넋을 잃고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환한 햇살이 작가의 등에 올라타서 반짝반짝 뛰어놀고 있는 장면이란, 마치 영화 촬영장 조명 아래의 배우를 보는 듯 그야말로 눈부신 광경이었다. 그 순간 작가의 기품 있는 뒷모습은 어쩐지 ‘작가란 이런 것이다.’ 하고 웅변하는 것 같았고, 나 역시 ‘맞습니다. 모름지기 작가란 이런 모습이죠.’ 하며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다.
카페 안은 간간이 작가가 두드리는 자판 소리만이 조용히 울렸다 사라졌고, 고요했다. 카페 사장 역시 작가와 오랜 호흡을 맞춘 파트너처럼 ‘한국 문학계의 혁명을 일으킬 작품을 숨죽여 기다린다’는 듯 컵을 달그닥거린다거나 하는 사소한 잡음도 일절 없이 조용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 나도 자연스레 숨죽일 수밖에 없었고, 조심스럽게 커피를 홀짝이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좁은 카페 안에선 ‘한국 문학계의 혁명을 일으킬 작품을 숨죽여 기다리는’ 카페 주인장과, ‘작가란 이런 것이다.’라고 말하는 멋진 뒷모습을 가진 작가와,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은 ‘먼 훗날 고전으로 남을 작품이 탄생할 역사적인 현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감동에 부풀어 있는 나, 이렇게 세 남자가 있었다. 정말이지 감격스러웠다. 카페를 찾아갔을 때 최민석 작가가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었는데, 타이밍 좋게 작가를 만난 것은 물론이며, 작가가 유튜브를 본다거나 누군가와 수다를 떨고 있는 모습도 아닌, 때마침 글을 쓰고 있는 순간이라니! 그 순간만큼은 최민석 작가의 작업실에 초대받은 듯했고, 살면서 라이브 공연은 봤지만, ‘이건 마치 라이브 라이팅writing을 직관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에 벅찼다.
나는 전반적으로 세상을 재미없고 시들시들하게 바라보는 축 처진 인간이지만, 간혹 이런 순간이면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느낀다.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예컨대 ‘지금 이 순간을 역사 속 현장이라고 생각해 보자.’ 식의 삶의 태도라고 말해 보면 어떨까? ‘사실 나는 지금으로부터 딱 100년 뒤인 2123년에서 건너온 사람이다. 동네 마트에서 30만 원어치 구매하고 받은 이벤트 응모권이 운 좋게 3등에 당첨되었고, 3등 경품이 우연히도 타임머신 티켓이었다. 타임머신에 올라타니 몇 개의 버튼이 잘 관리받은 치아처럼 가지런히 놓여 있었는데, 가보고 싶은 순간을 10년 간격으로 지정할 수 있었다. 그 무렵 나는 소설 「능력자」에 흠뻑 젖어 있었고, 김일두 노래에 만취해 있었기 때문에 고민할 것 없이 2010년행 버튼을 눌렀고, 그렇게 지금 최민석 작가가 글을 쓰는 현장을 함께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해 보는 식이다.
나도 안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처럼 정체 모를 차가 ‘짠’하고 나타나 평소 동경하던 과거의 한 시절로 나를 데려다주는 일 따윈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당연히 유재필이라는 인간이 레이먼드 카버를, 짐 모리슨을 만날 일이란 절대 없다. 물론 나도 과거로 갈 수 있다면 70년대로 돌아가서 젊은 날 김민기의 공연도 보고, 미국 땅에 떨어져서 쟈니 캐쉬의 공연도 보고 싶다고 공상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러기엔 내가 숨 쉬고 있는 이 시대에도 너무나 멋진 예술가들이 많지 않은가. 최민석도 있고, 김일두도 있고, 김태춘도, 반웅도 있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