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문득 건강이 걱정될 때가 있듯이, 나도 간혹 정신 건강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닌지 심각해질 때가 있다. 어떤 순간이냐면 영화 <악마를 보았다>를 보고 있을 때인데, 그런데 그동안 이 영화를 보아도 너무 많이 보았다는 것이다. 그 영화가 어떤 분위기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이런 걱정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참, 그런 영화를 몇 번씩이나 보다니.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니야~’ 하면서 말이다. ‘그러게요. 저도 고민입니다. 어쩌다 이런 영화를 이렇게나 많이 봤을까요?’ 하면서 괜스레 염려되는 것이다. 정신에 어떤 하자가 있는 건 아닌지 불안하지만, 이런 일로 정신 병원을 찾아가 ‘의사 선생님, 제가 <악마를 보았다>를 너무 많이 보는데 괜찮을까요?’ 하고 상담한다면, 의사 선생님도 마음속으로 ‘이 새끼 뭐지?’ 하고 난감해하지 않을까.
대충 체감하는 횟수를 세어보면 개봉 당시 영화관에서 관람한 게 첫 번째였다. 그 후 거실 소파에 몸을 묻고 OTT를 통해 감상한 게 4번, 그리고 PC 모니터 화면 한쪽에 조그맣게 창을 하나 띄워 재생해 두고, 다른 할 일을 하면서 설렁설렁 감상한 게 5번 정도 되는 것 같다. 좋아하면 여러 번 볼 수 있지 하고 가볍게 넘기기엔, 그동안 아무리 좋아하는 영화라도 세 번 이상 본 적은 드물다. 그렇기엔 다른 영화와 비교해서 <악마를 보았다>는 압도적으로 많이 본 편이다. 그러니 하필이면 이런 사이코패스 악마가 설치는 영화를, 더군다나 피비린내가 화면 밖으로까지 흘러넘쳐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영화를, 여러 차례 돌려보고 있는 나 자신을 두고 ‘왜 이러나’ 하며 여간 찝찝한 기분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 영화를 왜 그렇게 많이 봤는지 불편한 의문이 들지만, 스스로 수긍할만한 답은 나오지 않는다. 그저 배우 이병헌과 최민식을 아주 좋아한다는 정도. 그리고 한국 영화사상 최고의 악역으로 뽑아도 손색없을 캐릭터의 매력 때문인가. 아니면 평소 복수극을 좋아하는데 복수극만큼은 박찬욱의 복수 3부작보다 <악마를 보았다>를 더 높게 쳐주고 싶은 편애 섞인 감상일까, 또는 주인공 김수현(이병헌 역)에게 너무 감정 이입을 한 탓인가. 그래서 나 같아도 저런 악마라면 잡았다가 풀어주고, 낚았다가 놓아주며 가지고 놀면서 결코 한 번에 끝내지 않을 것 같은, 왠지 복수 방법이 너무 내 스타일처럼 느껴져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해보지만 실제로 영화 속 장경철 같은 인간을 만난다면, (내가 김수현만큼 센 것도 아닌데) 과연 그런 복수를 할 엄두가 날까.
그런데 직장 다니던 시절 어느 퇴근길이었다. 압구정역에서 3호선을 타고 귀가하는 지하철에서였고, 아마도 홍제, 녹번을 지날 때쯤이었을 거다. 정차한 역에서 남루한 용모의 한 남자가 열차 객실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왔다. 그리고 남자는 내가 바라보는 맞은편에 앉았다. 그런데 마주한 그 남자는 장경철이었다. 눈빛을 스친 찰나만으로 온몸에 소름이 타고 번지면서 살이 떨렸다. 그러니깐 ‘눈앞에 장경철이 나타나다니’ 하고 기절해서 놀랄 만큼 장경철과 빼닮은 사람이었다. <악마를 보았다> 영화 속 장경철로 분한 최민식의 외모를 닮았다는 말이 아니다. 얼굴은 완전히 달랐지만 뿜어져 나오는 악하고 음습한 분위기가 마치 영화 속에서 장경철이 그대로 걸어 나온 듯했다. 눈은 이성이란 없고, 평생 본능으로만 살아온 금수의 눈빛이었으며, 그 어떠한 공권력과 그 어떤 힘을 가진 자도 함부로 길들일 수 없을 것 같은 눈이었다. 그리고 단순히 무서운 인상이 아니다. 불길한 기운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의, 적의 같은 광포한 에너지가 기이하게 번뜩이면서 그를 감싸고 있었다. 이때까지 TV에서만 봐왔던 연쇄살인마를 실제로 본다면 분명 이런 숨 막히는 기운이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겁에 질려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칸으로 이동했다. 저 사람 근처에 있다간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른다.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당시 나도 피가 끓는 서른 살이었다. 거리에서 방자한 자객이 던져오는 거친 눈빛은, 응당 협객의 자세로 받아주는 호기도 있었다. 친구들에게서 소위 불꽃 남자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이글거리는 뜨거운 성질도 있었고, 방귀도 뀔 만큼 왕성하게 뀌고 다닌 놈이었다. 하지만 그 사람 앞에서는 순한 양도 아닌, 조그만 햄스터라도 된 것처럼 작아져서 쥐구멍을 찾는 모양새로 자리를 옮기고 말았다. 믿을 수 없었다. 단 한 번 마주친 아무런 정보도 없는 사람이 그렇게 무서울 수 있다니. 헝클어진 머리칼에, 그 안에 숱한 죽은자들이 매장되어 있을 것 같은 서늘한 눈, 옮겨 다닌 장소마다 모두 현장으로 만들고 왔을 것 같은 더러운 운동화, 인정이 담긴 따듯한 손길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을 것 같은 거뭇한 피부하며… 묘사하기도 어렵다. 그를 마주한 순간, 뭐라도 저지르고 살았고, 저지를 수 있고, 저지르며 살 것 같은, 이제껏 삶의 발자취에 한 번도 양지는 없었을 것 같은, 그렇게 무서운 사람은 처음 본 것이다.
살면서 그런 사람을 또다시 스칠 날이 있을까. 당연히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고, 다행인지 아직까지 그를 뛰어넘는 사람을 본 적은 없다. <악마를 보았다>를 보다 보면 그날 지하철에서의 마주한 그 남자가 머릿속 아주 어둡고 깊은 골짜기 같은 곳에서 안개가 걷히며 모습을 드러낸다. 정말로 무서운 등장이다. 지금까지도 내 머릿속 깊은 곳에 자리할 정도로 충격적인 인상이라면, 그 역시 알게 모르게 자신 앞에서 겁에 질려 뒷걸음치는 표정을 얼마나 많이 느끼고 살아왔을까. 하지만 사실 그도 어쩌다가 불행히 늑대의 탈을 썼을 뿐, 내면은 아주 순한 사슴 같은 사람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저 <악마를 보았다>를 너무 많이 본 내 잘못일 수 있다. 만화 <엔젤 전설>의 주인공처럼 얼굴이 그따위라서 오해를 달고 살뿐, 실제로는 연쇄살인마는커녕 벌레 한 마리도 못 죽이며, 모든 일에 감사한 마음을 지닌 천사일 가능성도 없지 않을 거다. 그래 그럴 수도 있을…거겠지만, 그를 다시 떠올리자 머리가 절레 절레 흔들어진다. 아무래도 역시 절대 그럴 리 없을 것 같다. 이만 글을 줄여야겠다. 만약에 언젠가 내가 유명해져서, 그날의 지하철에서 만난 장경철이 이 글을 읽는다면, ‘이 새끼 그때 기분 더럽게 나 보자마자 자리 피했던 그놈이구만’ 하고 찾아오면 어떡하나. 정말 무서울 것 같다. 그럴 리 없겠죠. 아, 내가 ‘유명한 작가가 된다’는 그럴 리는 없다구요? 네, 다행입니다.
1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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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은 참 신기한 곳입니다. 온갖 인간 군상이 다 모여 있습니다.
글과 그림 재밌게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