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분명 줄이 길겠지?’ <을밀대>로 걸어가는 길에는 늘 이런 생각이 든다. 사실 냉면집 줄은 매우 익숙다. 냉면집 앞에 모여든 사람의 수로 계절이 변하고 있음을 느낄 정도다. 벚꽃이 휘날리는 봄, 낮엔 긴 팔이 살짝 더워져 땀이 ‘송골’하고 보이면 냉면집 앞에도 송골송골 사람이 모이기 시작한다. 초복을 알리며 본격적으로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에는 점심이고 문전성시를 이룬다. 다른 음식이었다면 바로 돌아섰을 나도, 냉면 앞에서는 초조하게 발을 구르며 줄을 서게 만든다. 더운 날 밖에 서 있으면 땀이 주르륵 떨어지는데도 냉면을 포기할 수가 없다. 땀을 빼고 시뻘건 얼굴로 마시는 국물의 첫 모금이 정말로 환상적이기 때문이다.
날이 시원해지는 계절이 다가오면 기다란 줄도 조금씩 짧아져 저녁엔 바로 들어가서 먹을 수 있는 정도가 된다. 한겨울에는 평양냉면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 몇몇이 테이블을 지키고 있는데 그렇다고 사람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겨울의 평양냉면이 얼마나 맛있는지 아는 사람들은 다 알아버린 건 아닌가 싶다. 아무튼, 냉면집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린다는 건 아주 익숙한 일이지만, 겨울에는 겨울이라 먹고 싶고, 여름에는 여름이라 먹고 싶은 나에게도 <을밀대>의 유난히 기다란 줄은 냉면을 포기할까를 고민하게 만들곤 한다.
집에서 너무 먼 곳에 있는 것도 그렇고, 멀리 갔는데 줄을 한참 서야 하는 것도 그렇고, 심지어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맛있는 평양냉면을 먹을 수 있으니 <을밀대>까지 갈 마음이 쉽사리 생기지 않았다. 가까운 곳에서 먹어도 충분히 행복하고 즐거우니 <을밀대>는 자연스레 나와 멀어졌다. 하지만 이렇게 각 잡고 평양냉면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을밀대>를 빠지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런 이유로 오랜만에 마음먹고 <을밀대>를 찾았다(조금 핑계같지만).
더위가 오기 전 봄의 기운이 완연한 날이었지만 공덕역에서 내려 <을밀대>로 가는 길 내내 제발 줄이 짧기를 기도했다. 아직은 많은 사람이 냉면을 생각할 계절은 아니니깐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걸어갔다. 저 멀리 <을밀대>의 간판이 보였고 그 바로 밑을 확인했다. 살짝 봐도 골목으로 꺾여있는 줄이 눈에 들어왔다. “젠장”
<을밀대>가 을밀대 했다. 만삭이던 친구가 평양냉면이 먹고 싶다고 해 공덕역까지 데리고 왔는데 무거운 몸으로 줄까지 세워야 해서 미안하고 머쓱했다. 매번 줄까지 서가면서 먹느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지만, 눈빛에서 맛없으면 죽일 수도 있겠다는 느낌은 받았다. 반드시 맛있어야 했다. 종종걸음으로 걸어오느라 땀이 삐질, 줄이 길어서 삐질, 눈치를 받아서 삐질. 삐질거렸으니 내가 먹을 냉면은 먹어보지 않아도 맛있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대열의 가장 끝으로 줄을 섰다. 왼쪽 창가에선 녹두전을 굽는 냄새가 바람결을 따라 솔솔 퍼졌고, 오른쪽에서는 제면기가 열일을 하고 있었다. 메밀 면들이 쉴 틈 없이 뽑혀 나오고 있는 것을 보니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이미 내 마음은 저 제면기 아래로 뽑히는 메밀면에 가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힘들게 서 있는 친구에게 “그래도 오늘 줄 괜찮은 편이다. 요 정도면 설 만하지 않아?”라고 물었고, 친구는 “그래”라는 짧은 대답을 했다. 쉽사리 줄어들지 않는 줄에 내 마음은 똥줄이 탔다. 점심 시간대에 들어간 무리가 우르르 나오고 나서야 우리도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주문하려다 옆자리 냉면을 보니 맛이 느껴져서 또 흥분됐다. 기다렸던 것도 까맣게 잊고 저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행복함이 입꼬리에 전해져 웃음이 퍼졌다.
“물냉면 얼음 있는 거 한 그릇이랑 거냉으로 한 그릇 주세요”
<을밀대>는 기본적으로 살얼음이 들어가 있다. 이것이 싫다면 ‘거냉’이라고 얼음을 뺀 냉면을 주문하면 되는데 그렇다고 미지근한 건 아니니 오해 없이 취향껏 주문하면 된다. 친구는 얼음이 있는 냉면을, 나는 얼음이 없는 냉면을 주문했다. 다시 (실제로는 길지 않았겠지만 이미 마음이 메밀밭에 간 터라 체감상 긴) 기다림이 이어졌다. 기다림을 참지 못하고 종이 안에 소중하게 들어간 젓가락을 뽑아 드는데 무사의 칼처럼 기다랗다. 기다란 젓가락을 테이블에 탁탁 치니 마음가짐이 비장해진다. ‘내 오늘 <을밀대>의 냉면 한 그릇을 정복하겠어’
이윽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냉면이 앞에 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