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r's Room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by 오수영

친구와 오랜만에 길을 걸었다. 어릴 적 날마다 함께 걷던 천변 길이었다. 길은 여전한 모습으로 그곳에 남아 있었고, 우리도 변함없이 이 길로 돌아왔다. 우리는 천변의 풍경을 바라보며 한참을 걸었다. 시간이 흘렀을 뿐 우리는 한결같이 그때의 철없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게 우습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사실이 참 다행스럽기도 했다. 다만 대화의 주제가 그때와는 많이 달랐다.

그때는 특정한 주제 없이도 모든 대화가 장난처럼 즐겁기만 했는데, 이제는 대부분 잘 풀리지 않는 것들에 관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사랑과 결혼, 일과 회사와 같은 이야기들을 나누다 보니 우리는 농담에도 예전처럼 웃을 수 없는 사뭇 진지한 사람이 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순간 친구는 조금 지쳐 보였고, 나 또한 그리 다르지 않았다. 장난을 치며 이 길을 걷는 소년들이 비로소 생각처럼 풀리지 않는 세상의 쓴맛을 보게 된 것일까.

우리는 알게 모르게 무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조건의 사람이 되고자 발버둥치고 있었던 것일까. 누구를 위한 것이냐고 묻는다면 쉽사리 대답할 수 없을 것 같다. 사랑도 인생도 어느 지점까지만 전속력으로 달려내면 우승을 하는 게임이 아니었다. 우리는 분명 시작이 좋았다고 믿었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각자의 페이스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참을 앞서 간 사람들에게 질투나 불안을 느끼지 않을 깜냥은 없었던 것이다.

목적지가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막연한 희망을 품어보는 것뿐이 아닐까.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일단 저기까지만 걸어가면 알게 될지도 모른다고. 예상치도 못했던 다른 길을 발견한다거나, 어렴풋이 목적지가 보이게 된다거나, 더는 남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달리지 않아도 될 넉넉한 마음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예전처럼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어쩐지 그 웃음에서 약간의 씁쓸함이 묻어 나오는 걸 숨길 수는 없었다.
누구도 우리의 앞날에 대해 말해줄 수는 없지만, 우선은 저기까지만 걸어가 보려 한다. 그리고 그 이후의 일들에 대해서는 그곳에서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고. 다행스러운 건 새로운 관문 앞에 놓친 우리가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래전 함께 걸었던 이 길을 우리가 다시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오래도록 지치지 않게 만들어 줄 것이라 믿는다.

우리 일단 저기까지만 계속 가보자.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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