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의 댓글이다. 내 책을 읽은 누군가가 어딘가에 남긴 댓글 중 기억에 남는 게 있다. ‘굳이 이런 생각을 하는 거야, 피곤하게 사네’ 라는 말. 생판 모르는 사람도 나를 향해 이만큼 정확한 소리를 할 수 있구나. 맞다. 굳이 그런 생각을 했으니, 그런 글을 적었고, 그래서 피곤한 삶인 것도. 모두 맞는 말이다. 너무 맞는 말이라서 이렇게 기억하는 건지도 모른다. 허나 피곤한 삶인 것은 백 퍼센트 수긍하지만, ‘굳이 이런 생각을 하는 거야’에서는 어쩐지 순순히 동의할 수 없는 구석이 있어서 어쩐지 말대꾸를 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대댓글은 달지 않았다.
성공한 사람들은 아무 생각 하지 않는다는 말을 여기저기서 종종 본다. 요즘 통 책을 읽지 않아서 책에서 본 건 아니고, SNS에서 떠돌아다니는 말이다. 무심코 흘린 말이라도 유명하거나 성공한 사람의 말이라면, 금이 되고, 옥이 되고, 콘텐츠가 되기에 열심히 주워 담고 퍼 나르는 사람들이 지천이다 보니, 밥톨처럼 흘린 말이라도 바퀴벌레처럼 무섭게 번식한다. 그렇게 떠돌아다니는 말 중 김연아가 스트레칭하면서 허리에 손을 얹고 있는 캡처 화면을 가장 많이 본 것 같다.
“무슨 생각하면서 (스트레칭을) 하세요?”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
다만, 그 사진을 보면서 내 생각에 김연아가 말한 것처럼 운동 중에 ‘어떤 생각도 하지 않을까’하는 의문과 함께 고쳐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연아도 인간인데, 스트레칭하는 중에 머릿속에선 오전 훈련이 끝나고 점심 반찬은 뭐가 나올까 하는 소소한 잡생각은 하지 않을까. 또는 어제 코치가 지적해 준 부분이 머릿속을 스치진 않을까. 턴을 하거나, 점프를 하거나, 착지할 때 잘 안되는 부분을 어떻게 하면 개선할 수 있을지 많은 고민이 떠다닐지 모른다. 그러니깐 적어도 내 의견은 김연아가 이제까지 보여준 아름다운 연기도 수많은 시간 동안 축적된 생각의 결과물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 했다고 해서, 정말 생각 없이 맘 편히 이룩할 수 있는 위대한 길이 아니다.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라는 말을 두고 김연아의 성향이 단순한 스타일이구나 하고 단순한 생각으로 그칠 게 아니라,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침에 기상하고 훈련장까지 가는 동안 솟구쳐 오르는 숱한 마음을 지울 수 있는 단단한 사람으로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오늘은 훈련을 좀 째고 싶은 권태와, 어쩐지 감기 기운이… 하고 말하고 싶은 유혹 등 머릿속에서 차오르는 것을 정리하는 작업 말이다. 또는 내가 이 훈련을 견딘다고 해서 성공할 수 있을까, 많은 돈을 벌 수 있을까, 유명해질 수 있을까, 괜한 고생만 하다가 내 젊음만 낭비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 근심, 계산, 두려움 등의 어지러운 생각을 밀어내고 최대한 머릿속을 정리정돈하며 간결하게 만드는 것이지, 성공으로 향하는 길이 무작정 머리를 비우기만 하면 될 줄 아는 그런 식의 오판은 금물이다.
현재 나 역시도 글을 쓰는 순간순간마다 이 짓을 왜 하는지 마음이 어지럽다. 지금 책상 앞에서 소요한 시간과 노력이 온전히 돈이나 명예로 연결된다는 보장이 없다. 그따위 싸구려 계산과 저렴한 고민은 하고 싶지 않지만, 절대 저렴하지 않은 은행 대출 이자가 숨통을 조여오는 눈물 나는 상황에 내가 이렇게 책상 앞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어도 되냐 말이다. 내가 봐도, 누가 봐도 한심한 놈으로 보일 게 뻔하다. 그렇다면 멋진 글이라도 쓰던가. 그것도 아닌 이따위 글이나 쓸 바에야, 어디 가서 최저 시급이라도 받는 일이라도 하는 게 훨씬 가치 있음을 잘 알기에, 늘 책상 앞에 앉는 일이 쉽지 않다. 그러기에 나도 처절한 일상에서 여기 책상 앞에 앉기까지는 가급적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것이 김연아가 말한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와 같은 그러한 맥락이지 않을까. ‘훈련장까지 가는 길’ 말하자면 나에게는 책상 앞에 앉으러 오는 길. 딱 그곳까지 가는 동안은 머리를 비우고 그냥 자리에 앉는 거다. 그리고 분주하게 생각하고 글을 쓴다. 외부에서 바라볼 때 뭐 이렇게 피곤한 생각을 하느냐는 핀잔을 듣더라도 말이다. 모든 것이 생각을 비우는 단순함이 첫 발이더라도, 한 발 안으로 들어가면, 김연아의 연기도, 누군가의 창작물도 결국 치열한 생각의 축조물이다.
그러니깐 처음 말한 그 떠돌아다니는 말들. 김연아가 말한 아무 생각이 없다는 말은 내 생각에 그런 게 아닌, 실제로 김연아의 그 아름다운 연기는 수많은 생각의 결과물이라는 말이다. 역시 마찬가지로 내 아름다운 글은 나의 수많은…… (마무리 짓다가 생각 없이 헛소리할 뻔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