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후, 막바지에 이른 벚꽃을 보려고 동네 산책에 나섰다. 망원동과 합정동, 상수동 일대를 걸으며 햇볕을 쬐고 바람을 맞았다. 월급쟁이로 묶여 있는 생활이다 보니 평일에는 좀처럼 여유롭게 해바라기를 하기가 어렵다. 주말 낮시간에 길거리를 걷다 보면 계절이 성큼 다가온 것을 새삼스레 느끼게 된다. 먹고 사는 일에 급급하고 생활의 피로를 이기지 못해 놓쳐 버린 계절의 변화들이 아깝게 여겨진다.
당인리화력발전소로 향하는 골목에서 몇 번인가 발길을 멈추었다. 이름 모를 꽃과 나무. 저기 있었구나, 하고 알게 되는 건물 앞에 잠시 멈춰 서서 한낮의 햇볕에 드러난 그 모양새들을 바라봤다. 길은 문득문득 여수나 군산, 지방의 어느 소도시처럼 고즈넉해 보이다가 다시 서울의 번잡한 골목으로 복귀하기를 반복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 걷는 것이 아니라, 다만 걷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에도 공간도 느슨해지는 모양이다. 길 위에 다른 차원의 틈이 벌어지고 그 안으로 오래전 기억 속 공간이나 가 본 적 없는 이국의 정취 같은 것이 스며든다. 벚꽃은 거의 떨어져 있었다. 벚나무에 푸른 잎들이 제법 돋아 있어 어쩐지 억울한 마음이 되고 말았다.
산책을 하는 중에 유독 작은 카페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홍익대학교 인근은 이미 카페와 식당, 작은 상점 들로 포화 상태이고 수많은 가게가 생겼다가 곧잘 사라지기도 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인적이 드문 후미진 골목에까지 작은 카페와 식당이 심심치 않게 자리하고 있었다. 월급쟁이라면 한 번쯤 저런 카페 하나 하면 좋겠다고 상상해볼 법한,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가게들이었다. 가게 간판과 외관, 내부 인테리어에서 주인의 개성이 엿보였다. 그런 공간은 가지지 못한 자들에게는, 흔히 말하듯 일종의 ‘로망’이겠으나 주인에게는 밥벌이가 이루어지는 엄중한 곳이겠구나 생각하니 마음 한편이 무거웠다. 저 많은 카페의 주인들이 모두 월세를 걱정하지 않고 무사히 먹고사는 것인지, 빚을지고 떠나는 이들은 없는지 마음이 쓰였다.
일의 외양이 어찌 되었든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에 환멸을 느껴 보지 않은 이가 있을까.
자신의 힘으로 돈을 벌어 쌀과 옷을 사고 집세를 내는 것, 아끼는 이들에게 줄 선물을 살 수 있다는 것은 분명 귀하고 보람된 일이다. 그러나 나를 먹이고 입히는 돈이 누군가의 노동 시간과 맞바꾼 혹은 착취에 가까울 만큼 저렴한 가치와 교환되어 얻은 전리품처럼 느껴질 때, 그것이 타인이 아닌 자신의 시간을 헐값에 팔아넘기고 스스로를 착취한 것처럼 여겨질 때, 밥벌이의 환멸은 깊어진다.
직장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돈이 있을 때는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을 때는 돈이 없다고들 말한다. 이 도시에서 돈과 시간이 풍족한 삶을 꿈꾸지 않는 이는 드물지 않을까. 그래서 직장인들은 부적처럼 로또나 연금 복권을 사기도 한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그것이 가져다줄 시간의 자유를 잠시나마 꿈꿔 보는 것에 기꺼이 값을 치른다.
삶의 가치나 의미는 돈이 전부가 아니라고 인문, 철학, 종교 분야에서 제아무리 설파한다고 해도,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아름답다고 예찬한다 해도 평범한 사람들에게 돈이란 필요악일 때가 많다. 어떤 이들에게는 절대선이 되기도 한다.
얼마 전, 직장에서 인원 감축과 일부 팀원의 부서 이동이 있었다. 퇴사 방지를 위한 설문조사도 진행되었다. 사무실 공기는 어느 때보다도 스산하고 건조했다. 동료들은 점심시간이나 퇴근 후 삼삼오오 모여 회사 일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어진 삶의 시간 중 일정 부분을 온전히 일에 쏟아붓고 그 대가로 급여를 받지만, 거대 시스템 속에서 하나의 부품으로 소모되고 쉽게 대체된다는 모멸감은 모두에게 흠집을 남긴 것 같았다. 그럼에도 오전 아홉 시면 어김없이 업무를 시작했고 점심시간이 끝나면 모두 제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시스템에 순응하는, 자본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가는 나를 포함한 월급쟁이들을 비겁하다고 용기 없다고 위악적으로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당신의 선택이 아니었느냐고, 부조리한 시스템에 맞서 궐기해야 한다고 다그칠 수만도 없다. 생계와 얽힌 문제를 전적으로 시스템의 문제로 또는 개인의 문제로 간단하게 치부해 버릴 수도 없다. 그러나 내 안에서 엄연하게 이는 분노 또한 어쩔 도리가 없다.
누구나 <월든>을 쓴 소로처럼 속세로부터 벗어나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자신의 생을 걸만큼 하고 싶은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부양해야 할 가족이나 갚아야 할 빚으로부터 자유로운 것도 아니다. 누구나 부당한 일에 항거하고 고발하는 용기를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니라고 외쳐 봐야 이 밥벌이의 부조리함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지금의 나는 다만 이 분노를 기억하려고 애쓴다. 내가 낼 수 있는 목소리를 내려고 애쓴다. 노동에 구속되지 않은 나의 시간을 확보하려고 애쓴다. 누구나 살아가는 데 돈이 필요한 것처럼 그 누구에게도 침해받지 않는 시간, 영혼의 영역이 있어야만 한다고 믿고, 그 시간을 지켜 내기 위해 애쓴다. ‘시간은 돈이다.’라는 사회에 팽배한 시간의 가치를 거스르려고 애쓴다. 돈이 되지 않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쓰려고 애쓴다. 나는 다만 그렇게 애쓰는 중이다.
오늘 퇴근길에는 한 정거장 전에 내려 집까지 걸었다.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고 있었고 나의 피로는 정점에 달하고 있었다. 사위의 나무들이 뚜렷하게 푸르러진 것이 보였다. 계절이 뒤섞인 사람들의 옷차림을 관찰했다. 귀가하는 사람들의 그림자는 길고 짙었다. 곰곰이, 저녁밥으로 무엇을 먹으면 좋을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