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1년 아니 한 달에 먹는 떡볶이는 회수로 따지면 얼마나 될까. 나로 말할 거 같으면, 떡볶이 골목이 있는 학교에 다녔고 프렌차이즈 떡볶이 가게가 생기면 망할 수도 있을 정도로 유명한 떡볶이 가게가 있는 동네에 살았다. 덕분에 집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떡볶이의 달짝지근하면서도 매콤한, 튀김의 기름 냄새, 어묵 국물의 감칠향까지 더해져 십리도 못 가서 발병이 난 사람이 됐다. 분식의 존재를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환경이었다. 학교다닐 때는 일주일에 4번은 먹지 않았을까 싶고, 이후에도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먹어왔던 거 같다. 그러니 평생 떡볶이 먹은 양으로는 누구와 견줘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지금처럼 먹은 양으로만 자신이 있어야 했는데, 내가 간과했던 한 가지. 먹은 만큼 잘 만들 줄 알았단 것.
사람들이 그랬다. 많이 먹어 본 사람이 먹어 볼 줄도 알고, 만들기도 잘 한다고.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을 뿐인데, 왜 나에게는 통용되지 않는지 이 말이 시작된 지점을 찾아가 묻고 싶다. 제 입이 잘못된 것인가요? 아니면 제 손이 잘못된 것인가요? 그것도 아니라면 나를 만드신 신께선 입맛만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그래서 이 이야기는 내가 떡볶이를 잘만 먹을 줄 알았지 만들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시점의 에피소드다.
주말은 무조건 MT였다. 멤버십 트레이닝으로 퍼스널 트레이닝은 가질 수 없던 이십 대. 양평으로, 가평으로, 강촌으로 경춘라인의 곳곳을 파고들며 단합과 화합을 강조했다. 고기를 잘 굽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장작에 타오르는 불꽃의 빛만 의지하며 익었는지 덜 익었는지도 상관없이 겉이 탄 돼지고기를 단합의 상징처럼 먹었다. 웃음이 만병통치약이라고 했던가. 그런 고기를 먹고도 배탈로 응급실은 무슨 화장실마저 들락거린 사람이 없었다. 밖의 공기가 너무 덥거나 차가워지거나, 1차로 먹은 고기가 동이 나면 한 사람씩 실내로 이동했다. 당연히 불이 꺼질 때까지 불꽃을 놓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사람들은 많은 사람이 모인 곳으로 이동하기 마련이었다(불꽃을 놓지 못하는 사람이 나였거나,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나였던 거 같다). 그럼 이제 실내로 들어오면 무엇을 하겠는가. 멤버십 트레이닝의 꽃. 원형을 그리고 앉아 수건을 돌리고 냅다 뛰기 시작해 시들해지면 쥐를 잡기 시작하고 많은 쥐를 잡은 후엔 무시무시하게도 시민 사이에 숨어있는 마피아를 색출하며 진짜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합을 향한 트레이닝을 이어갔다. 1박 2일의 빡센 일정이기에 실내 트레이닝 중에는 중간중간마다 간식을 먹어줘야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뜨는 해를 마주하지 못하고 꿈속으로 도중 탈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간식을 다 먹고도 낙오자가 발생했다. 해가 지면 자야 하고 해가 뜨면 일어나는 닭띠는 아니지만, 닭과 비슷한 패턴을 갖고 있던 나였다(지금도!).
중간 간식. 하필 떡볶이 재료가 있었을 게 뭐람. 그때 나서질 말았어야 했다. 누군가는 말려줬어야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말리는 사람은 없었고 나는 나섰다. “떡볶이 먹을 사람~ 내가 만들어 줄게~” 나의 손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있었더라도 없었다고 생각될 정도로 근거 없는 자신감이 뿜뿜이었다(이 글을 보고 계실 분이 있다면 간곡히 요청하고 싶은 사항이 있다. 제가 가끔 이렇게 호기로울 때 제발 말려주시길 부탁드린다. 분명히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 될 거다).
딱딱한 떡 한 봉지, 대파 조금, 양파 조금, 고춧가루, 고추장. 내가 챙긴 재료는 이게 다였다. 떡볶이가 뭐 별건가 싶었다. 한 봉지의 떡이 들어갈 정도의 냄비에 물을 담아 떡을 넣고 불을 켰다. 그사이 대파와 양파를 송송 썰었다. 물이 끓기도 전에 알 수 없는 자신감으로 양파와 대파를 떡 사이에 빠트렸다. 그리고 브랜드 고추장의 뚜껑을 열어 고추장을 숟가락 한가득 펐다. 괜히 때를 기다리는 척 물이 끓어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끓어오르는 타이밍에 숟가락을 넣고 고추장을 풀었다. 말간 물이 고추장이 풀어지면서 붉게 변했다. 제법 떡볶이 근처로 가는 느낌이었다. 고추장을 풀었던 숟가락으로 국물 맛을 봤다. “웩-”
하. 맛을 보고서야 잘못됨을 알아챘다. 이순신 장군에게 열두 척의 배로 승리한 명량해전이 있듯 원재희에게도 한 가지 재료가 더 남았었다. 바로 고춧가루. 성공을 기원하며 명랑하게 고춧가루를 고루고루 뿌려 휘저었다. 콜록거리며 맛을 봤다. “욱-” 그때였다. 고추장과 고춧가루 냄새와 연기로 모락모락한 부엌에 친한 동생이 들어왔다.
“언니 잘 돼 가요?”
잘 될 턱이 없었다. 대답도 하기 전에 냄비 앞까지 온 동생은 나와 떡볶이를 쳐다보며 저도 맛을 보겠다고 했다. 저항도 못 한 채 숟가락을 빼앗겼고 금세 내 실력도 들통났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리는 모두가 들릴 정도로 웃었다. 불난 집에 빨리 불을 꺼야하니 넣을 수 있는 재료는 다 찾아 수습해 보기 시작했다. 찬장을 열어 후추와 소금, (하필) 참기름을 꺼냈고, 냉장고 열어 (하필) 케첩을 꺼냈다. 간이 안맞아 맹맹한 국물 맛이 제일 이상해 소금을 쳤다. 여전히 이상했다. 떡볶이는 빨갛고 케첩도 빨가니깐 빨간 건 넣어도 될 거 같았다. 있는 힘껏 케첩을 짰다. 당연하지만, 색만 맞춘다고 떡볶이가 되지 않았다. 태어나서 먹어본 수없이 많은 떡볶이 중에 어디에도 낄 수 없는 떡볶이가 되었다. 화룡점정을 생각하고 참기름을 들었다. “참기름 뿌리면 다 맛있잖아~ 뿌려보자.” 그제야 동생이 말렸다. 이제 이 떡볶이를 놓아주자고 했다. 떡볶이를 놓지 못한 나는 기어코 참기름을 한 바퀴 돌렸다. 떡볶이에서 맡을 수 없는 고소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그릇에 담지도 않고 냄비째로 트레이닝 중인 사람들 사이에 가져갔다. 다들 한입씩 먹자마자 과자를 뜯었다. 떡볶이를 떡볶이라 부를 수 없는 그런 음식을 만들어 낸 나는 조용히 냄비를 가지고 부엌에 가 구시렁거리며 “이게 떡볶이지 뭐야. 딱 떡볶이 색이네.”하고 한입 먹었다가 바로, “이거 떡볶이 아니네.”하고 이름 없는 어떤 것(음식도 아님)임을 바로 인정했다. 쌓아 올린 단합이 느슨해지는 맛이었다.
그날 바로 ‘떡볶이는 사 먹자!’ 이 일곱 글자를 가슴에 새겼다. 잠깐, 떡볶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