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주근접. 직장과 주거가 가까운 것을 의미하는 말로, 강남 부동산 불패의 이유 중 하나라고 한다. 좋은 일자리가 강남에 모여있으니 강남 주변, 강남과 가까운 곳의 집값이 오를 수밖에 없다. 결혼 후 강동구에서 구로구에 있는 대학원과, 강남구에 위치한 직장을 다니면서 처음으로 직주근접의 위력을 실감했다. 왕복 4시간 지하철 통학에 질려 부랴부랴 장롱면허를 꺼냈다. 학원 연수를 받고 남편에게 스파르타 교육을 받고 운전을 시작했다.
직접 운전을 해서 올림픽대로를 지나다니! 뭔가 뿌듯하고 설레는 마음도 있었다. 물론 긴장감과 부담감이 백배 더 컸지만 말이다. 운전을 하면서 내가 서울에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예전보다 예민하게 느끼게 됐다.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 양화대교 등 서울을 대표하는 고유명사의 지명들을 직접 운전을 해서 다니는 것은 지하철을 타고 신촌역과 을지로3가역, 학동역 같은 역명을 지나치며 다니는 것과는 다른 감각이었다.
강남의 회사에 다닐 때는 주차장을 이용할 수 없었다. 강동구 끝에 살면서 역삼동과 논현동의 회사에 다니기 위해서는 마을버스, 지하철 2~3번 갈아타기, 도보 10분 여정으로 왕복 2시간 반~3시간 통근을 해야 했다. 남편은 더 심각했다. 서초구의 본사에서 일하다 강서구 사무소로 발령을 받아 매일 서울을 횡단했다. 새벽마다 남편이 출근하면서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를 어렴풋이 들으며 다시 잠들었다. 그는 저녁 8시에 퇴근해도 밤 9~10시가 되어야 집에 도착했다. 이것은 서울에서 일하고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감수해야 하는 것일까? 당연한 것 혹은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양양은 직주근접이 가능한 물리적 조건이 갖춰진 곳이다. 하지만 시골이라 일할 곳이 적다. 양양은 인구가 3만이 채 안 되는 곳이다. 천만 인구의 서울과 비교하면 정말 말도 안 되게 작은 곳이다. 면적은 오히려 서울보다 넓지만 80% 이상이 산이라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지역은 훨씬 작다. 동해를 접하고 있고 설악산을 끼고 있지만, 인근의 속초나 강릉만큼 대형 관광지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그런 양양이 최근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일부 해변은 놀랍게 변했다. 서울양양고속도로가 완공되어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다양한 개발 사업과 환경 개선 사업도 추진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 평범한 시골이다. 기자, 기획자, 편집자로 일해 온 내가 다닐만한 회사나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무엇을 하면 좋을까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마음에 담은 목표는 ‘일에 종속되지 않는 삶’을 꾸려보는 것이었다. 양양행을 결정하고 나서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은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였다. 이는 어떻게 돈을 벌어서 먹고살 것인가 뿐만 아니라 하루의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다. 최근 지역에서의 삶을 계획하는 젊은 사람 중에 공방과 같은 작은 규모의 자영업을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마땅히 취직할 만한 회사나 좋은 일자리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혹은 서울이 아닌 곳에서의 삶을 선택하면서 시간과 재량 면에서 유연하게 일하는 방식을 고민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런 고민과 맞물려 일과 삶의 방식에 대한 책을 여러 권 읽었다. 워라밸은 단지 일과 여가의 시간 분배를 적절히 하는 것이 아니다. 내게 워라밸은 일과 삶이 서로 유리되지 않고, 일을 수행하는 주체와 삶을 꾸려가는 주체가 자기 안의 모순에 고통 받지 않는 밸런스이다. 그래서 데이비드 프레인의 『일하지 않을 권리』, 와타나베 이타루의 『시골 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케이시 윅스의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스가쓰케 마사노부의 『물욕 없는 세계』 등을 찾아 읽었다. 『물욕 없는 세계』 커버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정갈하게 살고 싶다.
생각과 물건의 공유를 즐긴다.
값비싼 것보다 값진 것을 원한다.
소소한 일상에서 행복을 발견한다.
네 항목 중 어느 한 곳에라도 공감한다면 당신은 여가를 갖고 일정을 균형 있게 관리하며, 느린 속도로 살면서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 자신의 가치관대로 살기를 원할 것이다.
언뜻 당연해 보이는 문장들이다. 하지만 도시, 특히 서울에서는 쉽게 가질 수 없는 것들이다. 또는 여기에 공감하지 않기에 도시에서 사는 삶을 선택하고 도시에서도 행복하게 사는 이들도 많다. 나는 딱히 느리게 살고 싶은 건 아니었다. 다만 내 속도로 살고 싶었다. 그것이 세상의 속도, 도시의 속도보다 느릴 수는 있다. 하지만 사는 곳이 달라지면 어떨까. 내 속도가 그곳의 속도보다 느리지 않을 수도 있다.
워라벨을 직주근접의 관점에서 본다면, 살고 싶은 곳과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곳이 같거나 가까운 것이 가장 좋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살고 싶은 곳과 하고 싶은 일은 내 차례가 되기 어렵고 이 둘이 나란히 가기란 더 어렵다. 그렇다면 차선은 무엇일까.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살고 싶지 않은 곳에 살거나, 살고 싶은 곳에서 살려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거나.
양양에서 남편은 작은 목공방을 운영하며 자기고용과 자기경영을 실험하게 될 것이었다. 나는? 솔직히 당시에는 잘 모르겠다는 마음이 컸다. 당연히 공방 일을 돕겠지만, ‘그것이 온전히 내 일인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인가?’라고 물었을 때 선뜻 그렇다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글을 쓰거나 프로젝트를 기획해서 운영하거나 청소년과 함께 공부를 하거나, 몇 가지 선택지를 떠올렸지만 정답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물론 가장 원했던 건 로또에 당첨된 백수로 온종일 집에서 책을 읽으며 뒹굴 거리는 삶이었다. 처음으로 매주 로또를 구입했다.
서울에서 20년 가까이 살았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살고 싶지 않은 곳에서 살았다. 다음 20년은 살고 싶은 곳에 살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해보면 어떨까? 혹은 살고 싶은 곳에서 살기 위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할 수도 있지않을까? 내게 하고 싶지 않은 일과 하기 싫은 일은 다르다. 물론 둘 다 남들보다 좀 많다고 생각했다.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것을 잘 참지 못한다. 참으면 병이 난다. 그래서 늘 회사 다니는 게 힘들었다. 양양에서 살기 위해 나는 어디까지 참을 수 있고 감당할 수 있을까? 이것이 반드시 하나를 손에 쥐기 위해 다른 하나를 놓아야 하는 제로섬 게임인 걸까? 양양으로 가기 전 서울에서 보낸 시간 동안 자신에게 계속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