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r's Room

성선설을 믿어요? 성악설을 믿어요?

by 유재필

운전 중에 또 만났네, 또 만났어. 공유 킥보드가 도로 한복판에서 당당히 버티며 길을 막고 있다. 차에서 내려 킥보드를 길 한쪽으로 치우면서 입에서 ‘하…’ 하고 한숨이 터지고 뒤따라 욕이 새어 나온다. ‘진짜 미x놈들인가… 여기다가 킥보드를 세우고 가냐….’ 불과 십 년 전에는 길에서 욕 나오게 만드는 인간이라 하면 내 앞에 걸어가며 담배 피우는 놈들 정도였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십 년이 흐르는 사이 나도 차를 몰기 시작했고,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도 변했고, 거리에도 새로운 스타일의 악인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최근에 대화 중 어떤 분이 “재필씨는 성선설을 믿어요? 성악설을 믿어요?” 하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성선설, 성악설이라. 정말 오랜만에 듣는 말이다. 중학교 때 도덕 수업 시간 이후 거의 처음 들어보는 것 같은데, 음, 성선설, 성악설 말고, 성무선악설 뭐 그런 것도 있지 않았나? 그 질문에 잠깐 고민하다가 “글쎄요, 성악설이지 않을까요?” 하고 답했다. 그 순간 때마침 머릿속에서 담배 물고 걸어 다니는 놈들이 스쳤던 건 아니었다.

그 대화가 꽤 신선했던 탓인지, 그 후 나도 주변 사람을 만날 때마다 재미 삼아 같은 질문을 던지고 다녔다. “성선설, 성악설 중에 어느 쪽이야?”. 그렇게 물어본 결과, 내가 아는 인간들은 어쩐지 모두가 ‘성악설’이라고 말했고, ‘성선설’이라고 답한 사람은 없었다. 백 명 정도 붙잡고 물어본다면 결과가 달랐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내 주변은 성악설이 대세였다. 내 주변 사람들도 길 위에서 담배 피우며 걸어 다니는 놈들을 어지간히 많이 보고 살았나보다.

내가 ‘성악설’이라고 말한 건, 대화 중 머릿속에서 성급히 튀어나온 답이었을 뿐, 인간이 선한 존재로 태어나는지, 태어날 때부터 악한 존재인지 뭘 알고 한 말이겠나. 역사 속의 철학자들이 머리 아프게 탐구해도 저마다 다른 주장을 논하는 문제를 말이다. 단지 살아오면서 선한 사람보다, 나쁜 놈이 훨씬 다수였던 기분이라서 말했을 뿐이다. 예컨대 내 앞에 담배 물고 걸어가며 침을 찍찍 뱉는 놈들이나, 차도나 인도 중앙에 킥보드를 던져놓고 가는 놈들, 그리고 지하철에서 서 있는 앞사람의 정강이를 툭툭 치고 있는 걸 알면서도 다리를 꼬고 앉은 그런 분들 말이다.

이쯤 되면 왜 그렇게 나쁜놈들만 꼬집어서 말하느냐, 세상엔 좋은 사람도 많지 않냐면서 내 이야기에 불편해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글쎄. 좋은 사람이 많은 건 맞지만, 좋은 사람이 나쁜 사람보다 많은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분명히 염두해야 할 것은 악인에게 걸려드는 일은 조심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누구라도 마치 교통사고처럼 당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그런 교통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지점이라도 미리 알아두자는 조심성인 걸까. 그렇게 나는 어느 순간부터 매주 토요일 밤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고 있다.

아무튼 그 방송에선 걸어 다니며 담배 피우는 그런 조무래기 정도로는 악인 축에 끼지도 못한다.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면 이 세상은 절대 살만한 곳이 아니라고 말할 것까진 없지만, 결코 ‘맘 편히’ 살만한 곳이 아니란 건 확실하다. 이제껏 저런 악인과 스치지 않고 멀쩡히 숨이 붙어있는 것만도 복이라면 복일 지경이다. 그래서 나는 인간의 본성이 어떤가보다는, 나쁜 놈들 속에서 어떻게 하면 스스로를 잘 지키면서 살 것인가가 관심이 크다. 그래서 나는 저 앞에 연기 뿜으며 걸어가는 새끼 뒤에서 어떻게 하면 나를 지킬 수 있을까 종종 고민해 왔다.

고민의 끝에 나는 그들을 날파리로 보자고 다짐했다. 밤길을 걷다 가로등 불빛 아래서 어지럽게 춤추는 수천 마리 날파리떼 사이를 재수 없게 잠시 지나게 되었을 뿐이라고, 단지 그럴 뿐인 거라고 되뇌는 것이다. 벌레가 성가시게 한다고 해서 감정을 소모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죽일 필요도 없다. 모두 죽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죽인다고 영영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저’, ‘그냥’, ‘잠시’, ‘단지’ 그러니깐 날파리뿐인 것이다. 그래서 재필씨는 성선설을 믿느냐, 성악설을 믿느냐 묻는다면, 그런 건 모르겠고, 날파리도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