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두기.
1월 1일에 신년 운세 풀이를 봤습니다. 용한 점집을 찾아간 건 아니고, 재미 삼아 핸드폰 운세 앱에서 소액을 결제한 정도입니다. 그렇게 받아본 24년 운세에서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올해는 배우자와 금실이 좋을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내용을 보고 믿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23년 12월 31일에도 한바탕 큰 싸움을 치룬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역시, 점은 재미로 보는 거지 하며 조금은 무시하듯 흘렸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정확히 2024년 1월 1일부터 지금까지 아내와 단 한 차례도 싸운 적이 없습니다. 단지 안 싸우는 것뿐만이 아니라, 신년 운세대로 사이가 좋아도 꽤 좋은 겁니다. 신년 운세대로인가. 믿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결혼한 후로 아내와 이런 호시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번 글 <아내의 핸드폰>은 애초 계획대로라면 수필집 『책방과 유재필』에 넣으려 했다가 아내의 검열에 걸려서 담지 못했던 글이었는데요. 혹시 이번 연재에 공개해도 되는지 슬쩍 물어봤더니, 어쩐지 아내가 공개해도 된다고 그러더군요. 허락해 주었다고 하더라도, (글을 읽어본다면 알겠지만) 일단 무릎부터 꿇고 시작하겠습니다. 제가 전부 잘못했습니다.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안타깝게도 식을 잡은 불과 몇 개월을 앞두고 팬데믹이라는 예상치 못한 전 세계적 재난이 덮쳤다. 아홉 시 뉴스에선 연일 심각한 소식만 흘러나왔고, 결혼 준비도 중단시킬 수밖에 없었다. 일단정지 버튼을 눌렀다가 코로나가 끝나는 시점에서 다시 재생만 누르면 될 단순한 문제가 아닌 듯 했다. 도미노 게임처럼 하나하나 세워나가던 블록이 팬데믹이라는 장애물에 부딪혔다. 그러고는 백스텝을 밟으며 촤르르 뒤로 자빠져가는 상황이 정말이지 허무했다. 어디서부터 바로 세워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 안개 속 상황이었다. 매일 쏟아지는 뉴스와 미디어에 신경을 모아봐도 팬데믹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다. 곤란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 그중에서도 이미 구해놓은 신혼집이 골칫거리였다. 식이 끝나고 들어가서 지낼 예정이었는데, 무작정 팬데믹이 종료되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러다 결국 부모님의 허락을 구하고, 식을 올리기 전에 이미 살림을 합치게 되었다. 그런데 결혼식 준비 과정에서 팬데믹이라는 변수에 시달렸던 스트레스 탓이었을까. 우리 부부 싸움의 명경기는 대부분 이 기간에 치러졌다.
아내와 지난한 싸움을 하는 동안 ‘와…’하고 감탄했던 적이 몇 번인가 있다. 그 감탄이란 단순한 놀라움의 표현은 아니고, 경외감에 가까운 것이다. 좀 더 다르게 표현해 보자면 내가 그동안 아! ‘아내를 생각보다 만만하게 봤구나’ 라거나, 아! ‘나보다 몇 수 위에 있구나’ 라거나, 아! ‘앞으로의 싸움에서 내게 승산이 있을까’ 하는 ‘아!’하고 감탄밖에 안 나오는, 말하자면 자연스레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는 기억 말이다.
그럼, 그 순간을 말해보자면, 정말 부끄럽지만 이 무렵에 내가 얼마나 한심한 짓을 저질렀는지… 아내와 싸우던 중 일본 영화 <자학의 시>에서의 남편처럼 아내가 차린 밥상을 날려버린 적이 있다. 내 손에서 퉁겨져 오른 반찬들이 허공에서 현란한 공중제비를 한 후, 그대로 바닥에 축 늘어졌다. 그리고 어쩐지 밥상을 그렇게 날려버릴 정도면 정신 줄도 함께 놓음 직한데, 일은 이 지경으로 벌려놓고선 곧바로 아내의 표정부터 살폈다. 그런데 아내는 의외로 차분했다. 역시 오랜 시간 책의 곁에서 일한 아내여서 그럴까. 그 차분함은 나로 하여금 훌륭한 스릴러 소설을 읽을 때처럼 극한의 공포로 몰아갔고, 다음 페이지를 상상하게 했다. 도대체 이 차분함은 뭘 말하는 것일까. 아내는 몇 분 정도 미동도 없이 서서 방바닥에 엎드려 누운 밥과 반찬을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그러고서 침착하게 핸드폰을 꺼내더니 카메라 앱을 열어 바닥에 널브러진 반찬들을 하나, 둘…. 핸드폰 속에 주워 담았다. 나는 그 행동을 보면서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물었다.
“니가 한 짓 다 찍어두려고”
그걸 찍어서 뭐 하려고 또 묻자, 아내는 말이 없었다.
시간이 지난 후 그것들을 왜 찍었는지 알 수 있었는데, 그것은 일종의 핵탄두를 저장해갔던 것이다. 예컨대 내가 그날의 비슷한 실수를 반복할 조짐이 보이면 아내는 어김없이 그 사진을 내 얼굴에 들이밀었다. 핸드폰 화면은 지난날 아내가 보관한 사진이, 한 명의 수신자에게 날아갈 대기를 하고 있었다. 수신자는 바로 장인어른이다. 모든 준비를 마쳐 놓고 아내의 손가락은 보내기 버튼 위에서 ‘나를 완전히 보내버리겠다’는 눈빛으로 매섭게 빛이 났다. 얼마나 살벌한지 눈빛에서 ‘어디 한번 끝장을 보자’는 날을 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더 이상 잃을 것 없는 자와 마음에 결단을 내린 자의 서슬이다. 그 눈에서 새어 나오는 서늘한 한기에 나는 섬뜩할 수밖에 없었고 완전히 압도당했다. 김정은이가 핵미사일 버튼 위에서 손가락을 까딱거리고 있으면, 그 앞에선 아무리 트럼프라도 동공이 자리를 못 잡고 식은땀이 날 수밖에 없듯이, 나 역시 아무리 세게 나가다가도, 아내가 그렇게 나오면 그저 겁먹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내가 아무리 손아귀에 핵무기를 쥐고 있다고 하더라도 갑자기 나라는 인간이 한 번에 개과천선할 수는 없다. 한심하게 그 후로도 다른 부류의 실수를 저질렀고, 그럴 때마다 증거 수집의 조예가 남다른 아내의 핸드폰 속에서 핵탄두가 한 개, 두 개, 세 개…. 차곡차곡 쌓여갔(을 것이)다. 어떨 때는 비밀 요원처럼 아내의 핸드폰에 잠입해 그 무시무시한 핵탄두를 하나하나 제거하는 상상을 하지만, 그렇게 했다간 더 큰 후폭풍이 덮칠 거라는 것을 알아서 감히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궁금하다. 아내의 핸드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