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요리를 잘하는 남자를 마주하면 마음이 쉽게 열린다. 외모도 성격도 가치관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가 만든 요리를 맛보기만 해도. 이유는 아마도 복합적일 것이다. 여러 이유 중 하나 :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자란 나는 아버지가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거나 설거지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요리를 포함한 모든 살림은 어머니의 역할로 당연시되는 집안 분위기에서 자랐기 때문에, 나는 그 역할에 능숙한 남성을 보면 (우리 아버지에게는 없는) 대단한 매력의 소유자라는 착각에 빠지곤 한다. 또 다른 이유 둘 : 세상 모든 일이 저마다 가치가 있지만, 나는 남을 위해 밥을 짓는 일이야말로 가장 숭고하고 위대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음식으로 남을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이라면, 엄마라도, 하숙집 아주머니라도, 여자 요리사라도, 나는 그들에게 해픈 사랑과 존경을 표하곤 했다.
직장을 다닐 때 아버지의 전직이 일식집 셰프였던 직장 동료가 있었다. 그녀는 점심으로 종종 김밥을 싸서 왔는데, 그녀의 아버지께서 손수 싸주신 김밥이라고 했다. 아버님께서는 당신의 딸이 직장동료 서너 명과 나눠 먹을 수 있을만큼 많은 양의 김밥을 항상 챙겨주셨다. 직장동료가 나에게 처음 김밥을 건넸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아버지가 김밥을 싸주셨다고?!’ 그녀가 나눠준 김밥은 일식집에서만 맛볼 수 있는 폭신하고 달달한 계란이 들어가서 더 맛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아버지가 싸준 김밥’ 이어서, 나에게는 각별하게 다가왔다.
직장동료에게는 새벽에 일어나 김밥 재료를 준비하고 김밥을 마는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나 익숙해서 식상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풍경을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나는 그녀가 마냥 부럽기만 했다. ‘어떤 남자랑 결혼하고 싶냐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가족을 위해서 김밥을 마는 남자라고 말해야지.’ 직장동료의 아버지를 뵌 적은 없지만, 그녀가 싸온 김밥을 먹을 때마다 그녀의 아버지를 흠모하는 마음이 내 안에 퐁퐁 샘솟았다.
그렇다고 해서 주방 일에 젬병인 우리 아버지가 싫었던 건 아니다. 우리 아버지 역시 당신만의 매력이 충분한 사람이었다. 한 예로, 아버지는 어학이나 운동 같은 취미 활동을 수년간 꾸준히 갈고닦아서 일정 수준의 실력에 도달하는데, 그걸 남에게 절대 자랑하는 일이 없었다. 가족들도 한 5년쯤 지나 식사 자리에서 우연히 알게 되는 정도였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과묵하실 수가 있을까?’ 가끔은 답답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멋있다고도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아버지의 매력은 다른 아버지의 가정적이고 다정한 모습 앞에서만큼은 빛을 잃었다. 결혼하고 처음 시댁을 방문했을 때였다. 시댁에서도 주방 일은 모두 어머님 몫이었지만, 친정에서와는 달리, 아버님께서 주방에 들어와 활약하시는 순간이 있었다. 바로 손수 원두를 갈고 물을 끓여 커피를 내리는 일을 할 때였다. 나는 커피를 내려주시는 아버님 앞에서 본능적으로 마음이 활짝 열렸다. 만약 내가 음식 재료를 다듬고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하는 아버님의 모습을 봤다면 어땠을까? 아마 그 자리에서 아버님의 열렬한 팬이 되었을 거다.
결혼 후, 나는 요리하는 남자에 대한 내 로망을 투명하게 인정하고서, 그 로망을 실현하기 위해 남편에게 주방 일의 일부를 일임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내 임의대로 남편에게 역할 주었다’기보다는 ‘주방 일에 관하여 남편이 나보다 더 잘하는 영역은 그에게 온전히 맡겼다’는 쪽이 맞겠다. 남편은 가족을 위해 김밥을 싸주는 남자나 아내를 위해 파스타를 만들어 주는 남자는 아니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고기만큼은 기막히게 잘 굽는 남자, 자기가 좋아하는 꼬막만큼은 해감하고 삶을 줄 아는 남자, 자기가 좋아하는 문어만큼은 제대로 삶고 반듯하게 썰어서 그릇에 아름답게 담아내는 남자였다. 남편이 무얼 하든 주방에서 분주한 모습한 모습만 보아도 나는 설레었다. 남편이 나보다 잘하는 음식에 관해서 만큼은 남편이 요리사가 되고 나는 관망자이길 바랐다. 영원히.
여담인데, 남편을 만나기 전 일이다. 나는 언젠가 결혼한다면 요리사가 직업인 남자와 결혼하지 않을까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곧잘 말하곤 했다. 그만큼 요리하는 남자에 대한 내 이상과 로망은 한껏 부풀어 있었다. 모든 일이 그렇듯 결혼 역시나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하루는 남편에게 그랬다고 했더니 남편은 어릴 적 꿈이 요리사였다고, 조용히 고백했다. 그랬구나, 결혼할 때는 몰랐지만 내 로망의 절반은 실현된 셈이니 나는 그걸로 만족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