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r's Room

우리의 우정은 현재 진행 중

by 서해인

힘겨운 진실을 꾸준히 바라볼 때 나는 조금 더 나 자신에 가까워진다

어른의 우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10년 가까이 알아 온 친구가 말했다. 나는 원래 이런 이야기를 먼저 꺼내는 쪽이었지, 무방비하게 습격 당하는 쪽은 아니었다. 그 질문은 언제든 내 안에서 우선순위의 꼭대기를 점하고 있는 화두였다. 중요한 만큼 잘 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순순히 원하는 결과를 내어주지 않았다. 그 결과, 한 시절을 끝나버린 우정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하는 데에 보냈다. 지금을 살아가게 만드는 느슨한 연대의 토대. 언젠가 실버세대가 될 나를 위한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 우정이 중요한 건 그런 거창한 대의 때문이 아니다. 수년 전에 나는 이런저런 문제들을 그러모아서 찾아간 상담 선생님과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나 : “내가 좋아하는 친구가 내 생각과 내 상태를 찰떡같이 알아차려 주길 바라는 마음이 자꾸만 빗나가서 못 살겠어요.”
선생님 : “해인 님이 친구와 주고받길 바라는 찰떡같음의 기준이 너무 높은 것 같아요.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개떡 같은 면을 가지고 있답니다.”

그 시절의 나는 세부적인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 친구 한 명만 있어도 생의 수많은 지지부진한 부분을 견딜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누군가에게 맥락을 설명하는 데에 최선을 다했다. 내가 왜 거기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는지, 왜 그 순간 울고 싶었는지, 왜 어쩔 수 없었다고밖에 할 말이 없는 건에 대하여, 나는 말하고 또 말했다. 그건 자세한 이야기가 생략되더라도 상대가 나를, 그리고 내가 상대를 속속들이 파악하는 불가능한 경지를 꿈꾸었기 때문이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궁극의 친구 사이이기 때문에.

언제나 나는 우정이 위협받는다고 느끼는 신호에 무척 예민했다. 그런 시그널은 대개 외부가 아니라 둘 사이에서 생겨났는데 내 입장에서는 늘 우정의 상호 주체 중 상대방, 즉 나의 친구가 문제의 근원인 것처럼 느껴졌다. 지난 학기에 매점에 함께 가는 길에 해사하게 웃어주던 친구가 다음 학기가 되자마자 다른 또래들과 붙어 다니는 걸 감내해야만 하는 일이 생기곤 했다. 지금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싶지만 당시에는 세상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그런 일들이 있을 때마다 나는 친구의 어깨를 돌려세우고 “혹시 내가 뭘 잘못했는지 알려줄래?”라고 묻는 대신, “우린 끝이지?”라며 물음표가 붙은 마침표를 던졌다. 용맹하게 관계의 끝을 따져 묻고서야 마저 갈 길을 갈 수 있었다.

멀어진 수많은 관계들은 내 안에서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하루 열 네시간씩 붙어 있던 입시 학원에서는 다섯 명 정도가 점심과 저녁을 함께 먹으며 보이지 않는 미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20대 후반에는 2년 가까이 쉐어하우스에서 여섯 명이 함께 산 적도 있다. 그동안 꽤 많은 무리에 들고 났지만 지금은 그들 중 아무와도 연락을 주고 받지 않는다. 오래 보는 진정한 친구로 남을 수 있겠다고 여겼던 사람들과 물리적으로 멀어지는 동시에 거짓말처럼 연락이 끊어졌다. 우정생활인 줄 알고 임했던 모든 것이 지난날의 사회생활로 남아버렸다.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나는 매 번 이 우정이 깨질까 봐 사소한 실금을 봉합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까?

똑바로 앞을 보고, 입을 다물고, 온전하게 균형을 잡는 것

나는 친구 사이를 다룬 이야기를 자주 찾아본다. 책이나 영화는 말할 것도 없지만, 선우정아의 음악도 빼놓을 수 없다. (내가 뮤지션 선우정아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이름에 ‘우정’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사과를 위한 골든타임을 놓쳐버릴 정도로로 제 인생이 바쁘기 때문에 나에게 차라리 얼굴을 비추지 않고 숨어버린 지난 인연을 떠올린다.

“평범한 어느 날 친구는 사라졌어/친구가 와야 할 자리엔 다른 사람/배신이 혼자 기다리고 있었어/배신은 친구가 바쁘다고 했어/친구가 자신을 보냈다고 했어/난 배신과 시간을 보냈어”
-선우정아 ‘배신이 기다리고 있다(Betrayal Awaits)’

이 노래는 어제까지 친했지만 예고 없이 잠수를 타버리면서 ‘잠수 전에 최소한의 설명을 들을 자격도 없는 나는 그에게 누구였는가’를 자문하게 했던 옛 친구를 떠올렸다. 그로부터 시간이 오래 지난 후 나는 “모든 연락을 두절한 게 너 때문만은 아니었다”라는 요지의 말을 듣는 자리에 나가게 됐는데, 이것이 마치 치정극 같은 한 편의 우정쇼라고 생각했다.

또 다른 배신은 처음 보는 아이의 얼굴을 하며 다가왔다. 오로지 아이 사진만을 올리는 지인들의 숫자가 겉잡을 수 없이 많아졌던 시기. 그들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보면서 나는 지난날 쌓아온 우정이 조용히 허물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내가 클릭한 좋아요가 ‘오늘의 아이’를 좋아한다는 건지 ‘오늘의 엄마로 레벨업한 너’를 긍정한다는 건지 도저히 구분되지 않았다. 아이도 좋고, 너도 좋지만, 아이 이야기만 하는 너를 좋아하기는 어려워. 이것이 나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급기야 어느 한 아이의 사진에만 좋아요를 누를 수 없으므로 실시간으로 업데이트 되는 친구들의 2세 사진에 좋아요를 배분하듯 클릭하고 있는 내 안의 기계적인 공정함이 싫었다.

30대 중반의 나는 “제가 친구가 너무 없어서요”라는 말을 하면서 그 말이 진짜라고 믿는다. 상대가 나를 친구가 많은 사람으로 바라보는 게 싫어서 그러는 건데, 대체 그게 왜 그렇게까지 싫은지 모르겠다. 얕고 넓은 관계보다 깊고 좁은 관계를 추구하는 스타일이라는 걸 드러내고 싶어서? 너무 고전적이다. 인간관계를 맺는 방식을 말로 설명하는 건 얼마나 허술한 일인가. 실제로 무엇이 진실인지는 나와 현재 우정을 나누고 있는 당사자들만이 알 수 있는데.

그런데도 프리랜서로서 경제 활동을 하기 위해 계속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야만 하는 체제 때문인지, 명분이 없으면 만나서 차 마시자는 말을 절대로 꺼내지 않는 나 같은 사람도 작은 명분을 굴려 점점 눈덩이로 만드는 일을 하면서 지내고는 한다. 최근의 나는 우선 상대를 ‘궁금해하는 척’을 하는데 이러한 의식적인 노력이 실제로 상대를 더 알고 싶어지는 호기심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의식적이라는 걸 내가 의식하고 있다는 것만이 유일한 문제지만, 더이상 나는 내 안에 상대를 향한 진심이 차오르기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그럴 시간에 움직이면서 진심을 만든다. 새로운 우정의 시작을 이런 식으로 도모한다.

‘우정 현재진행중’에 있는 이들에 대해서는 혹독한 연습을 필요로 하는 상황이 있다. 이를테면 친구는 스스로를 도저히 믿어주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있고, 나로서는 네가 어떤 선택을 하든 괜찮다는 걸 최선을 다해 알려주는 게 가장 중요한 미션처럼 느껴지는 때.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은 “왜 아직도 거기서 그러고 있어, 얼른 탈출해!”지만, 더는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생일대의 선택을 앞둔(것처럼 보이는) 갈림길에서 어떤 선택지를 골라도 “너는 너야”라는 말을 듣는 건 각별하게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더는 내 입장에서 보기에 맞는(옳은) 말을 반복하다가 결국 상대를 잃는 길로 나아가지 않는다. 이것은 무척 힘든 일이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진실이 있다. 친구의 어떤 선택에 대해 내가 이해하지 않기로 작정하는 순간, 여기서부터는 어리석은 그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어느새 편협해진 내 문제가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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