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를 다녀온 친구들의 사진, 파리의 낭만을 극적으로 담아낸 사진가들의 엽서,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나 <비포 선셋>에서 본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 이국의 향이 반겨주는 진짜 파리에 왔다.
고풍스러운 상앗빛 오스만 양식의 건물들. 직선의 거리에서 느껴지는 힘과 멋. 그 길 따라 빗살처럼 늘어선 석조 외벽과 연철 발코니, 맨사드 지붕 장식들의 조화. 무엇보다, 모든 건물 1층에서 ‘우리 모두 인생을 즐깁시다.’라고 담합한 듯 여유롭게 테라스에 앉아 와인잔을 짤랑이는 파리 사람들의 정오 운치가 나를 사정없이 홀린다.
차분하면서도 활기가 느껴지는 도시. 길의 사람들은 경주하는 도시인들 같지 않고 대부분 읽거나 말하거나 뭔가를 즐기고 있는 듯한데, 차림새도 참 멋있다. ‘그래, 거대한 조각 같은 도시에 살면 누구라도 대충 입을 수 없지.’ 괴상하다 생각했던 불어의 발음도 너무 멋들어지게 느껴진다. 음운들 간의 흐름이 유려하다고나 할까, 가만히 불어를 듣다 보면, 언어에도 장식이 달려있는 듯 우아해 보인다. 파리, 정말 예술 그 자체 같은 도시. ‘파리이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일까, 이 아름다운 것들의 합이 파리를 아름답게 만든 것일까’ 같은생각을 하며 목적 없이 한참을 걷는다.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특별한 뭔가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걷다가 걷다가 도시 전체가 예술 테마파크 같다는 착란에 잘 재현해 낸 장식이구나 만져보는데, 웬걸. 모든 것이 고목의 뿌리처럼 단단하다. 그럴듯하게 재현해 낸 것이 아니라 재현의 대상인 원형인 거다. 오리지널(original). 그 오리지널들 속에 있다 보니, 백 년 단위의 나이를 가진 건물들 사이의 구정물이나 퀴퀴한 냄새들조차 아주 오래전 파리의 <베르사유의 장미>나 <레미제라블> 같은 것들을 연상시켜주기도 하고, 울퉁불퉁 돌길은 이 길을 사색하며 산책했을 수많은 예술가를 떠올리게 해 준다. ‘이 길은 뭘까, 저 길에선 무슨 일이 있었을까.’ 지천에 농도 짙은 이야기가 배어 있다고 생각하니, 몸 안의 순정이 휘돌아 몇 번씩이고 멀미 같은 쾌감이 난다.
직선의 거리를 벗어나면, 파리를 어떠한 도시라고 상정하는 것이 조금 촌스러운 일이라는 걸 느낀다. 선한 품위를 지켜낸 공원, 햇빛에 누워 책을 읽는 사람들, 일상과 소풍의 경계를 무시하듯 벤치와 난간에 걸터앉아 도시락을 먹는 사람들, 점심시간에 잠깐 나온 회사원인지, 관광객인지 구별할 수 없는 활기의 뒤섞임. 자유로운 키스, 예술가로 인정받지 못한 거리의 고흐들, 낡은 아코디언의 독백, 저 멀리 보이는 농담 같은 에펠 탑.
온갖 유난을 떠는 나와 함께 미림이 짧은 탄성을 내지른다.
“아. 파리다.”
그래. 지금 내가 서 있는 지금 이곳은, 진짜 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