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서른셋. 나는 인륜지대사 그 어떤 것에 관해서도 ‘적정기’는 없다고 믿는 밀레니얼 세대이지만, 베이비부머 세대인 부모님은 나를 과년한 딸이라고 표현한다. 정말 너무한 단어다. 과하게 나이를 먹었다 이거다. 과년하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실로 한 달 걸러 청첩 모임 또는 결혼식 스케줄이 생기는 나이인 것은 사실이다. 이미 결혼한 친구들은 둘째 아이를 낳을지 말지, 묶느니 마느니 고민하고 어떤 친구들은 오래 사귄 사람과 마침표를 찍을지말지 고민한다. 결혼하면 결혼한 대로 고민을 갖고 있고, 미혼 커플이라면 또 그 나름대로 고민을 갖고 있는 주변인들을 둔 싱글의 나로서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마냥 싱글벙글하기에는 어쩐지 이런 기분이었다. 마치 모두가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릴 때 아무 증상도 없는 사람의 건강함처럼 어쩐지 즐거운 것 같다가도 어쩐지 고독한 것이었다.
혼자라는 것이 건강한 즐거움처럼 느껴지다가도 누구도 파고들 수 없는 튼튼함이 어쩐지 야속할 지경이라고 느껴질 즈음.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코로나 시기보다 더 길고 길었던 솔로의 시기가 종식됐다. 마침내. 튼튼해서 야속했던 내 면역체계를 뚫고 나에게 파고든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나는 그 사람을 그이라고 부른다. 그이는 외국인이다. 나는 외국에서 건너온 이름 모를 병에 걸린 것 같았다. 토할 것 같았다. 지금 내 사랑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어서 여기저기 토해냈다. 처음으로 인스타그램에 그이와 손을 잡은 사진을 올리자마자 사람들은 자꾸 세상을 멈추려 들었다.
“잠깐만요.”
“잠시만요.”
“세상아 멈춰.”
오랫동안 튼튼했던 한 솔로의 다른 국면에 지인들은 일단 세상을 멈추고 어찌 된 영문인지 물어왔다. 나는 어느 때보다 근면하고 성실하게 그들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렇게 됐지 뭐~”로 운을 떼고는 나의 러브스토리를 신나게 토해냈다.
토하기 직전 속이 울렁거리는 것처럼 시원하게 이 사랑을 토해버릴까 그냥 나만 알고 삼킬까 고민이 되는 적도 많다. 사람들의 관심을 기반으로 이런저런 일을 만들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프리랜서의 삶에서 인스타그램이라는 곳은 나를 표현하는 무대 같은 곳이자, 늘 고독하게 독립적으로 일해야 하는 인디 워커에게 유일한 사회이자 연결성의 행복을 충족시켜 주는 곳이기도 하다. 친구들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의 시작과 진행이 있는 곳. 그러나 예전 회사 사람들, 지금 나한테 일을 주고받는 관계자분들, 이제는 명절에도 보기 힘든 일가친척들까지 말 그대로 내가 살아오며 마주친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보고 있는 인스타그램 피드에 토할 것 같은 내 사랑을 모두 다 털어 내보이기는 어쩐지 좀 저어되는 것이다. 때마침 아주 시의적절하게 ‘쓰레드(Threads)’라는 것이 생겼다. 인스타그램에서 만든 트위터 같은 것이었다. 사진보다 짧은 문장을 시시때때로 올리는 곳. 옳거니! 그래! 너로 정했다! 나는 쓰레드를 사랑을 토하는 곳으로 마음먹었다. 그간의 행보 위주로 적었던 인스타그램의 프로필과는 달리 쓰레드 프로필에는 <사랑팍에 난 몰라>라고 써놓을 지경이었다.
SNS를 일기장이자 나를 돌아보는 역사책으로 활용하는 사람으로서 일상에서 벌어지는 큰 사건들은 기록으로 남겨놓고 싶었다. 한 번은 이 말을 해놓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요즘 내 근황은 사랑뿐이거든요. 사실.” 실로 이때 근황이라고는 사랑에 빠진 나날밖에 없었다. 물론 다른 것들이 있었겠지만 추호도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을 어쩌겠나. 인터넷 세상에 토해낸 내 사랑의 달콤함은 누리꾼들의 새콤함으로 되돌아왔다.
“미쳐~” “어우~” “우웩” 등등… 만 나이 서른셋의 새로운 연애란 당사자에게나 보는 사람에게나 토할 것 같은 것이었다. 친한 친구들일수록 생레몬을 입에 문 것처럼 잔뜩 얼굴을 일그러뜨리기도 했지만 내심 중독된 눈치이기도 했다. 그이에 관한 새로운 소식이 뜸해지면 “오늘은 뭐 없어?” “결방인가요?”라며 웹툰 연재 또는 연애 프로그램의 새로운 에피소드를 기다리듯 물어왔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의 풋풋함은 아마도 주변에서 더 싱그럽고 자극적으로 느끼는 듯했다.
내 입장에서 이 사랑은 오히려 자극이 없었다. 아마도 그이 이전에 만났던 사람들이 해로웠던 탓이다. 그네들은 늘 제 멋대로였다. 연락도, 의사결정도, 스킨십도 지들 맘대로였으니까.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늘 그네들에게 맞춰주려는 성향인 내가 문제라고 여겼고 그이를 만나기 전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사랑하기에 시작이 두려워지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반면 그이는 항상 먼저 내 의사를 물었고 내 기분을 신경 쓰고 고민하고, 상의했다. 누우면 그대로 내 모습이 남는 메모리 폼처럼 내 테두리 하나하나를 부드럽게 끌어안는 느낌이었다. 뾰족한 구석 하나 없이 포근하고 달기만 한 그이에게 나는 진심으로 궁금해서 이렇게 물었다. “자기는 어쩜 이렇게 Sweet 해?” 외국인 그이는 서툰 한국어로 내 건강을 걱정했다. “난 Erika께 당뇨병까지 주지 않기를 바라.” 이 말을 들은 나의 심경을 걸그룹 에스파의 데뷔 초 영상 카리나의 대사를 빌려 이야기하고 싶다. “정말 심장 토하는 줄 알았어요.” 대충 너무 귀여웠다는 뜻이다.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난 모르겠다 그이를 사랑하지 않는 방법.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이 토하지 않기를 바란다)
맛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그이는 맛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이다. (이렇게 그이 자랑을 시작해 본다) 요리와 게더링을 기반으로 모임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일과 음식을 만들고 맛보고 이런저런 글을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나보다도 복잡한 조리법을 잘 알고 있거나, 재료에 대한 감각이 좋아서 나를 놀라게 한 적이 왕왕 있다. 한 번은 사과를 사러 같이 무인 과일가게에 갔다가, 아보카도를 집어 들면서 “혹시 과카몰레 하면 어때?”라고 물어서 놀랐다. ‘앗쭈? 과카몰레를 만들 줄 아시겠다? 제법이야?’ 맛을 잘 보는 사람은 많지만 맛을 만드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많이 먹어본 경험보다도 요리해 먹어 본 경험치가 있어야 하니까. 각자 서로 혼자 살았던 경험이 있어서, 각자 스스로를 경영해 본 경험이 있어서, 각자 스스로를 먹여 살린 경험이 있어서 틈새로 새어 나는 말과 행동들로 그가 살아온 역사가 토로되는 것이었다. 이런 부분이 놀라움이자 장점으로 느낄 수 있는 연륜과 혜안을 가진 시기에 그이를 만난 것은 다행이자 행운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더 이른 나이였다면 분명 이렇게 놀랍지는 않을 터.
20대에는 잃어버린 내 반쪽은 어디 있을까 자주 생각했다. ‘어딘가 있겠지? 있긴 한 걸까? 태어나긴 한 걸까?’ 나의 외로움이나 불완전함을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고 채우려고 했던 것. 사람에게 상처받고 실망하면서도 내가 스스로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어야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너무 당연한 생각이지만 자기 연민이 자욱하게 눈을 가리던 시기에는 맑게 들여다볼 수 없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지 않고 나를 채우려고 했다. 토할 때까지. 나를 토해낼 수 있을 때까지. 사랑을 해낼 수 있을 때까지. 여러 사람을 겪고 스스로에 대해서도 고민해 보며 나름대로 자아를 채우느라 고군분투하던 짜디짠 시기를 지나 타인에 대한 이해와 흡수가 용이하면서도 사랑을 토해낼 수 있는 충만한 나로 가득 찬 시기는 20대의 테두리를 벗어나서야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30대가 되어 그이를 만나면서 드는 생각은 드디어 내 반쪽을 찾았다는 느낌보다 완전한 두 세계가 만나 더 커다랗고 풍요로운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간다는 생각이 든다. 만 나이 서른셋이 되어 시작하는 연애의 장점일지도 모르겠다. 베이비부머 세대에게는 과년한 나이이겠으나 밀레니얼 세대인 나에게는 정확히 알맞은 시기라고 생각한다. 서로의 세계가 어느 정도 탄탄하게 컸지만, 적절히 소금기도 들었고, 상대의 테두리를 흡수할 수 있는 촉감으로 적절히 발효된 상태. 그렇게 탄탄하지만 또 말랑해진 상태로 그이를 만나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아주 자주 한다.
그이와 나는 서로에게 토한다. 사랑을. 자주 표현하고, 자주 토로한다. 가능한 상세하고 자세한 감정을 토로한다. 표현한다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사랑을 시시때때로 토한다. 마치 삼투압 현상처럼 서로의 농도를 뱉어내고 흡수해 가며 사랑을 주고받는다. 마치 절인 배추와 김치 양념이 얽히고설켜 염분을 뱉어내고 미생물을 얻어내고 서로의 당을 분해해 가며 발효하는 것처럼. 그이와 내 세계는 밀착되어 뽀글거리며 발효되고 있다. 한 포기의 묵은지처럼 고즈넉하게 익어가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