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r's Room

자신은 없지만

by 이헤

로봇이라는 단어 주변으로 동그란 테두리를 그리고 익숙하게 가지치기를 해가며 연상되는 단어들을 늘어놓았다. 깡통 로봇, 고장 난, 기술, 기계, 사람, 공감 능력. 그러다 번뜩 생각나는 게 있어 유튜브 검색창으로 마우스 커서를 이동시켰다. 검지에 가볍게 힘을 한 번 주고서는 손가락을 서둘러 움직였다. 3년 전 한 방송국에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VR이라는 첨단 기술을 통해 사연자와 고인이 된 소중한 사람이 다시 만나는 내용이었다. 사연자의 이야기, 인물 간의 관계성과 함께 제작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어 낯선 기술에 대한 이질감을 자연스럽게 허물었다.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는 후기들이 계속해서 올라와 나는 보지 않았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 같은 심정이더라도 감내해야 하는 것이 순리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억울한 푸념과도 같은 속마음을 명치 언저리에 툭 내뱉고 말았다.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실은 울지 않을 자신이 없어서, 더 솔직하게는 사연자의 이야기가 아닌 내가 잃은 그녀를 떠올리게 될 것 같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리운 한 사람이 있다. 노트에 그녀가 태어난 해와 내가 태어난 해를 나란히 적어 보았다. 그녀가 스물여섯 살이 되던 봄에 우린 처음 만났고, 내가 스물여섯 살이 되던 겨울에 영영 이별을 해버렸다. 동생들과 함께 그녀의 유품을 나눠 가졌는데 내게는 십자가 목걸이와 그녀의 공간 여기저기에서 발견된 사진들이 있다. 오랜만에 그 사진들을 꺼냈다. 어쩌면 사진은 시간의 꼬리를 종이 한 장에 묶어두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몇 장의 사진들이 오래된 기억을 유인한다. 시간의 배열을 무시한 채 강렬한 장면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한다. 어느새 나는 과거 어딘가를 관망하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지금에서야 훨씬 더 세세히 엄마를 살펴보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하늘색 민소매에 짧은 남색 반바지를 입고 있다. 엄마는 왼손을 왼쪽 무릎 위에 올린 채 바쁘게 움직이며 일을 하고 있다. 자동차 부품을 조립하는 일종의 부업이었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내가 앉아 있다. 엄마의 시선은 부품보다는 내 얼굴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런데도 불량품을 거의 만들지 않는 엄마의 기술력이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순수함도 언뜻언뜻 느껴졌다. 어린 나도 엄마를 돕고 있다. 벌집과 유사한 모양으로 촘촘하게 홈이 파여 있는 플라스틱 부품을 왼손에 든다. 홈마다 끼워 넣어야 하는 전선이 정해져 있는데 전선을 좁은 구멍 안으로 하나씩 밀어 넣을 때마다 딸깍하고 결합의 소리가 난다. 엄마와 똑같은 노동의 소리를 만들어 내는 내가 제법 어른스러워 보여 조금 우쭐대기도 했다. 마치 엄마의 옷과 구두를 뺏어 입은 것처럼. 마지막 부품을 조립하고 나면 허공에 대고 우리는 동시에 기지개를 시원하게 켰다. 개운한 몸짓이다. 뿌듯해하는 나를 위해 엄마는 서둘러 저녁을 준비한다. 그런데 장면은 흘러가고 있지만 귀로 들려오는 소리는 없다. 서로 나눴던 대화가 기억이 나질 않아 윙윙대는 진동과 함께 뻐끔거리는 입 모양만 불분명하게 보일 뿐이다. 여기서 기억이 끊어졌다. 아쉬운 마음이 들어 미간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세게 눈을 감았다. 그러자 집 앞 마당으로 배경이 빠르게 전환된다.

눈꺼풀 안쪽 까만 배경 속으로 마당에 심겨있던 나무들이 보인다. 살구나무, 감나무, 목련 나무, 석류나무가 있다. 엄마는 목련 나무를 가장 좋아했다. 꽃잎이 하얗고 깨끗해서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새콤달콤한 열매를 맺어내는 살구나무와 석류나무를 좋아했다. 엄마가 열매를 따주는 그 모습이 좋았다. 꽃구경을 마친 엄마는 집으로 들어가기 전, 껍질이 갈라져 빨간 과육이 훤히 드러나는 석류 하나를 따다 반으로 갈라 내 손에 얹어주었다. 그 맛이 얼마나 생생하게 느껴졌는지 순간 혀 밑으로 침이 고여 왔다. 꼴깍 침을 삼키며 눈을 떴다. 내 방 가득 자리 잡은 정적이 두 뺨을 세차게 때리는 듯했다. 내가 정말 유체 이탈이라도 한 걸까. 잠깐이지만 아무런 감각을 느끼지 못했다. 방 안을 두리번거리며 사진을 정리하고 다시 수납함 속에 넣었다. 어째서 로봇으로 출발해 엄마와의 기억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었을까. 문득, 조금 전 검색해 둔 다큐멘터리 영상을 클릭하고 싶어졌다. 울지 않고 볼 자신은 없지만, 또 가상현실 속 엄마와의 재회는 아무래도 별로일 것 같다는 꽉 막힌 생각 역시 변하지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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