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r's Room

어느 카페 사장님을 생각하며

by 유재필

책방의 하루가 시작하기 전의 고요를 좋아한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텅 빈 사무실의 고요를 사랑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책방도 마찬가지다. 밥줄이 걸린 처절한 공간이지만, 눈여겨보면 사랑할 만한 것들이 틈새 곳곳에 숨어있다. 여유라는 건 이런 거구나 하고 머리로 만끽하고 몸으로 젖어보는 시간이다. 물론 그런 여유를 즐기려면 한두 시간 일찍 와서는 안 된다. 최대한 거북이처럼 행동이 느려도 상관없고, 수시로 멍때려도 영업 준비에 아무런 차질이 없을 정도여야 한다. 오픈 시간보다 3~4시간 정도 넉넉히 일찍 와서 누구의 눈치 없이, 텅 빈 가벼운 머리로 고요 속에서 내 일을 살펴보며 준비할 수 있는 이 시간이 좋다. 그 시간에는 주로 다쿠아즈를 만든다. 그리고 다쿠아즈를 만들면서 일본어 공부도 할 겸 일드를 틀어놓거나, 아니면 팟캐스트를 틀어놓거나인데, 요즘은 송은이, 김숙의 <비밀보장>을 많이 듣고 있다. 평소 정신없는 하이톤의 수다는 웬만하면 꺼리는 편이지만, <비밀보장>만큼은 듣다 보면 어느 순간 나도 함께 깔깔거리고 있다.

어느 하루 <비밀보장>에서 시작부터 귀가 쫑긋하게 되는 사연자의 고민이 나오고 있었다. 사연을 요약하면 이렇다. 사연자인 20대 여성분이 소개팅을 통해 사귀게 된 남자와 설레는 첫 데이트를 했다고 한다. 남자와 함께 인스타그램에 저장해두었던 예쁜 카페에 갔는데, 하필이면 그날 배가 아팠다고 한다. 그래서 화장실에서 볼일을 봤다고 한다. 그런데 지난 인생사 전체를 훑어봐도 이제껏 본 적 없는 기록적인 용량이 쏟아졌고, 그만 변기가 막혀버렸다고 한다. 압도적인 스케일 앞에서 여자는 압도되었고, 식은땀이 흘렀다고 한다. 아무도 모르게 현장을 빠져나갔으면 나이스베리굿(Nice Very Good!)이었겠지만, 마침 문밖에선 다른 손님이 기다리고 있는 기척이었다고 한다. 여자는 애써 침착하려 했다고 한다. ‘당황하지 말고 물을 내려보자, 의외로 시원하게 내려갈지도 모르잖아’ 하는 기대로 레버를 눌렀지만, 내용물은 변기 밖으로 시원하게 흘러넘쳤다고 한다. 여자는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공교롭게도 화장실은 그 예쁜 카페 내부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니깐 화장실 문을 여는 순간, 카페 전체를 물들일 냄새와 함께 이런 난잡한 상황을 이제 사귄 지 얼마 안 된 남자가 알게 될 텐데, 그 걱정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고 한다. 그래서 화장실 안에서 어떻게든 수습해 보려고 별안간 노력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상황은 더 꼬여만 갔고, 변기에서 흘러넘친 그 똥물은 바닥에서 차오르며 한계 수위인 문턱을 넘쳤다고 한다. 결국 똥물은 화장실 문틈으로 빠져나가 마치 징그러운 뱀처럼 카페 바닥을 기어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상황을 모두 지켜본 남자와는 그 이후에 한 번 정도 더 만나긴 했지만, 자연스러운 이별을 했다고 한다. 그랬다고 한다…

나는 이 사연을 듣고는, ‘거 참 안타까운 이별이군요’ 하며 사연녀의 마음에 공감하는 게 아닌, 누군지 모를 카페 사장님을 생각하며 무척이나 마음이 아파왔다. 동종업자로서 정작 사연 속에서 언급 한번 되지 않은 카페 사장님의 심정이 어땠을지 고스란히 전해져온 것이다. 영업 중에 웬 날벼락인가. 장사를 시작하면서 무수한 어려움을 각오했겠지만, 결코 이런 상황은 상상도 못 했을 거다. 좌우지간 이 냄새를 어떻게 하면 좋은가. 공기 청정기로 수습이 되는 냄새인가. 성능이 좋은 비싼 공기 청정기 브랜드를 고민하다가, 값싼 걸 샀던 게 별안간 후회로 밀려올지도 모른다. 공간에 함께 있던 다른 손님에게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런 경우도 환불을 해줘야 하는지, 네이버나 유튜브에 이럴 땐 어떻게 하냐고 사례를 찾아보진 않았을까. 검색창에 어떤 키워드를 쳐야 하나. ‘카페 똥물 넘친 사건?’ 그건 그렇고 흘러넘친 똥물은 그 물의 주인에게 알아서 치우도록 내버려둘 것인가. 아니면 사장인 내 손으로 치워야 할 것인가. 변상을 요구해야 하나. (잠깐만, 그런데 무엇에 대한 변상이지? 냄새를 퍼뜨린 것에 대한 변상? 변기를 막히게 한 변상?) 그리고 현장에 있던 다른 손님들이 이 상황을 두고 네이버 방문자 리뷰 속에 언급하면 어떡하나. 살다 살다 이런 날이 다 있구나 하는 심정이었을 것 같고, 힘들게 끊은 담배를 꺼내 물지도 모르겠다.

나도 현재 운영하는 책방에 화장실이 건물 외부에 있어서 느꼈던 불편함이 있었다. 예컨대 손님도 그렇고, 나도 비 오는 날에는 화장실을 가려면 우산을 쓰고 가야 한다던가, 출퇴근 시 화장실 문단속을 별도로 해줘야 한다든지 그런 불편한 점이 있다고 적어 보니… 만약 사연 속의 그 카페 사장님이 듣는다면 ‘참 소소하네요’ 하고 피식 웃지 않을까 한다.
누군가는 어떤 문제에 처하게 된 사람에게, 사전에 예상할 수 없었냐고 묻기도 한다. 맞다. 예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그런데 예상하고 대비를 하면 그게 ‘문제’인가. ‘문제’가 성립하기 위한 전제 조건에 ‘예상’이 있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 나는 사람들의 모든 이야기는 조금이라도 들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그 이야기가 어떤 ‘문제’에 관한 것이라면 말이다. 아무튼 화장실이 외부에 있어서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다음 책방이 이사를 하게 된다면, 그리고 지금처럼 커피나 식음료를 팔게 된다면 절대 내부에 화장실이 있는 공간은 선택하지 않을 것 같다. 이런 중요한 깨달음을 그 팟캐스트 속 사연자에 고마움을 전해야 할지, 사연 속 등장하지 않은 카페 사장님에게 감사함을 느껴야 할지 애매하다.

책방의 하루를 열기 전 고요한 시간을 좋아한다. 마음이 여유롭고, 머리를 비우니 세상 사람들의 모든 이야기가 교훈처럼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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