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r's Room

글 쓰는 일정이 잡혀있네요

by 유재필

묘하게 외로운 느낌이다. 살기 위해 거리에서 음식물 봉투를 파헤치던 길고양이 한 마리가 머리 위로 쓱 지나간다. 연재하겠다고 말하고부터는 매일 머리통에서 뭐라도 나올까 싶어 며칠은 굶은 듯한 앙상한 마음이 되어 글감을 뒤적이고 있다. 마흔 살이나 되어선 마치 세상에 덩그러니 버려진 고아가 된 기분이다. 누구도 내게 이런 글 써보라며 글감을 차려주지 않는다. 아무리 글감이 없어도, 다른 사람이 알 바 아니다. 어떻게든 혼자서 해결해야만 한다. 그리고 떠오르지 않는 글감도 문제지만, 그보단 빽빽한 일상에서 글 쓸 시간을 어떻게 확보할지 조급하다. 뭐랄까, 매 순간 머릿속 구석에서 사이렌이 울고 있는 것 같달까. 연재한다는 건 이렇게 매 순간이 비상 상황이구나. 피로에 쩔은 하루하루다. 어쩔 수 없지.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혼자서 벌인 일 아닌가. 아니지, 그래도 이 비장한 길에 반웅 작가가 함께 걸어가 주고 있구나. 아무튼 연재라는 틀 속에 스스로를 구겨 넣은 꼴이긴 해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한다. 사람들이 자유, 자유 좋아하지만, 가끔 이렇게 스스로를 감옥에 집어넣고 채찍질하지 않고서는 평생 입으로만 허풍 떠는 (유재필 같은) 인간들이 있지 않은가. 어쨌든 나 자신과의 이 약속을 1년, 2년, 길게는 10년, 20년 오래 지켜낸다면 꽤 뿌듯하지 않을까. 그런 상상을 하면서 살짝 설레기도 한다. 그쯤 되면 어디서도 가식 같은 겸손은 던져두고 당당히 ‘글 쓰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며 살 수 있지 않을까.

아무튼 이왕 이렇게 된 거, 모양 빠지게 마감에 질질 끌려다니고 싶진 않다. 쫓아오는 시간을 따돌리며, 여유 있게 앞서가고 싶다. 가야 할 길이 아득한데 벌써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들어선 곤란하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 연재를 무탈하게 완주할 수 있을지 고민해 봤다. 어떻게 하면 나의 일상에 초대한 ‘연재’를 불청객 취급하지 않고, 마치 제 집에 온 듯 편안한 손님처럼 모실 수 있을까.
작가들에게 저마다 루틴을 가지고 있을 테다. 어떤 이는 아침에 일어나서 모닝커피를 마시는 것으로 하루의 시동을 걸고, 머리를 맑게 준비하여 자신만의 서재로 입장하는 폼나는 전업 작가가 있다던가. 또는 직장을 다니면서 퇴근 후 저녁 시간에 자기만의 방에서 글을 쓴다던가. 즉 고정적인 시간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핑계 대고 싶진 않지만 나 같은 자영업자는 대체로 온전한 시간이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온전한 시간은 있을지라도, 그 시간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온전한 마음이 없다. 기분 탓이겠지만 왠지 자영업자가 된 이후로 마음속의 하늘이 맑고 청명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책방 사장의 마음속 날씨는 365일 우중충한 흐림에 눈물 같은 비가 추적추적 따갑게 때린다. 매일 닦고 쓸어도 하루만 지나면 책방 걱정은 먼지처럼 머리 위로 내려와 소복이 쌓여있다.

아침은 운동을 가야 하거나(운동이 글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디저트를 만들어야 하기에 아침 시간은 좀처럼 여유가 없다. 그리고 낮에는 책방에서 손님을 응대하고, 설거지하다 보면 어느 순간 밖은 어두워져 있다. 밖에서 보면 여유롭기만 한 책방의 속사정은 실제로 감당이 어려울 만큼 고장 난 시계처럼 빠르게 돌아간다. 당연히 글에 집중할 수 있는 여유로운 마음 같은 건 없다. 그리고 저녁에는 주로 책방에서 진행하는 워크숍이나 북토크 등 행사 스케줄이 잡혀있을 때가 잦아서 고정적인 시간을 내기가 힘들다.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틈나는 시간에 감사하며 짬짬이 글을 써왔는데… 도대체가 글이 써지지 않는다.

그러던 중 문득 그렇게 써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 될 때마다 쓰겠다니. 그러니깐 글감도 이런 건방 떠는 인간은 코웃음 치며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 같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이런 놈이 ‘시간 되거든 봅시다’ 하고 있으니, 글감이 나를 만나줄 리 없다. 쓰는 글마다 지루한 글만 내놓는 주제에 ‘기본자세부터 틀려먹었네’ 하지 않을까. 그러니 나 같은 인간은 글을 쓰기 위해선 글감과 약속을 해야한다. 그 시간이 간절해야 한다. 마치 인생에서 절호의 기회를 줄 것 같은 투자자와의 만남을 앞둔 것처럼 글감을 기다리며 마음이 두근두근거려야 한다. 그렇게 글감하고의 미팅을 아주 중요한 이벤트처럼 마주해야 한다. 그래야 겨우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온전히 내 시간을, 글감을 위해서 빼두어야 하고, 스케줄에 체크해두어야 한다. 무슨 요일, 몇 시는 글을 쓰는 날이다. 시간에 맞춰 마중 나가 글감이 오시길 기다려야 한다. 당연히 그 시간에 또 다른 약속을 잡을 수 없다. 글을 써야 하는 (글감을 뵈러 가는) 선약이 잡혀있기 때문이다. 그 정도 대접은 해줘야 나 같은 놈도 겨우 글을 써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누군가와 약속을 잡을 때면, ‘잠시만요~’ 하고 스케줄을 확인하고는, ‘아, 그날은 좀 곤란합니다. 글 쓰는 일정이 잡혀있네요’. 하고 다소 재수 없게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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